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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남은 오뎅볶음.
먹고 남은 오뎅볶음. ⓒ 한문순
오늘 아침엔 어묵볶음과 소시지볶음, 그리고 호박된장찌개를 끓였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세 가지 다 태어나서 처음 해 봤다. 한심하다 할 사람 많을 테지만 한심이고 두심이고 나는 신이 나서 그런 말쯤 백 번을 듣는다 해도 그냥 귓등으로 새나가기만 할 것 같다.

영국에 열흘 남짓 머무는 동안 거의 반은 친구 집에서 묵었는데, 둘이 함께 자취를 하며 유학 중인 친구들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나처럼 요리를 싫어하거나 그 즐거움을 모르는 이였지만, 그 중 한 사람은 비교적 요리를 좋아하는 이라 그 덕에 잘 얻어먹었다.

화려한 밥상은 아니었어도 멀리 가서 이른 아침, 그 일어나기 싫은 시간에 준비한 아침을 먹는 일은 고맙고 황송한 일이기도 했다. 평소에 그들은 아침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엉뚱한 죽염이긴 했지만 무거운 죽염과 떡볶이며 그들의 고향에서 올라온 어머니의 선물까지 이고지고 멀리 찾아갔던 나에게 그들은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도 같다.

어쨌거나 나는 그들에게 조금 감동을 했고, 식탁에 감동 받아 내가 한 요리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을 난생처음 해 보게 된다.

여행갈 즈음 나의 컨디션은 다운 다운 다운으로 치솟았던 바, 친구들의 친절에도 부담이 전혀 없던 것 아니었고 살짝 눈치까지 보면서, 내가 요즘 상태가 왜 이런가 마음 복잡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 그랬던 흔적은 어디로 가서 찾아야 할지, 즐거운 추억만 손에 쥐고 신나는 독신의 성취에 도취하며 나날이 남모르는 호들갑에 홀로 젖곤 하는 것이다.

원래 나는 작고 사소한 일에 신나게 감동한다. 하도 보이지 않는 사소한 것들이라 그런지 때때로 남들은 뭘 갖고 저래, 그게 그럴 만큼 즐거워? 하는 순간들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재미가 아무리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더라도 좋은 일 아닌가.

때깔 좋고 화려한 일에 감동하는 큰 그릇과 큰 인물들은 그 나름 그런 일에 즐거우면 되는 일이고, 나처럼 사소한 것에 스스로 환호하며 즐거운 이들은 또 그렇게 살면서 이렇게든 저렇게든 스스로 행복하고 만족스런 일생을 보낸다면 좋은 거 아닐까.

간이란 너무 뜨거운 상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좀 식어야 제 맛이 나는지 첫 간들이 다 시들시들해도 막상 식사를 할 때쯤이면, 오호~ 맛있고나!

된장찌개야 어제 서영이네 (내가 놀아주는 세 살짜리 여자 아이) 집에서 간단한 설명을 듣고, 그 집에서 얻은 둥근 호박에 두부를 넣고 양념해서 끓였는데 맛이 괜찮다. 인터넷이란 정말 독신에겐 얼마나 좋은 도구인지, 어묵볶음은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받아 이거 저거 그거 요거 섞고 볶고, 지글지글했는데 요리란 것들이 생각보다 매우 간단한 작업이기도 하다.

나의 호들갑 이면에는 요리와 살림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공포가 가셨다는 기쁨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식사준비는 엄마를 괴롭히는 힘겨운 일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엄마의 힘겨움을 덜어드리고 싶었지만 막상 요리할 엄두는 잘 나지 않았다.

그 덕에 괴로움은 두 배였다. 힘든 엄마를 괴롭게 보면서도 막상 돕지는 않았으니 그 죄의식까지 괴로움은 두 배였다. 게다가 여자에게만 강요되는 듯한 불평등한 역할분담에 굴복하는 기분도 싫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어린 아이들이 성장해가면서 어떤 일들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온전한 즐거움을 방해하는 세상 요소들이 드물지 않다.)

냉장고는 그런 나의 독신 생활 상당기간 동안 죄의식의 보고이기도 했다. 언젠가 변질한 음식들을 보고서는 신경을 써 주지 않은 먹을거리들의 복수라는 시(詩)를 쓴 적도 있다.

변질한 상태를 목도 하는 일도, 버리는 일도, 먹지 않고 냉장고에 담아두기만 하는 일도 모두 다 마음에 짐이기만 했다. 이토록 먹는 일에 대해 무능했던 내가 모양은 어찌되었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태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더는 냉장고가 죄의식의 보고가 아니니, 살림이고 요리고 그다지 지겹고 힘든 일이 아니라 재밌고 쉬운 일이라는 걸 알아버렸으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도 매일 삼시 세 끼 그래야 한다면 곧 녹다운되겠지? 오해하지는 마시라, 살림이 쉽다는 것은 과거 내가 지닌 살림에 대한 두려움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살림에 대해 마초들이 생각하는 몰염치한 평가 절하와 같은 이야기가 절대로 아니니까. 살림의 가치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말할 기회가 있으리라.)

혼자 장을 보고, 혼자 형광등 갈고, 혼자 의자를 주워 집안 좋은 자리에 두고 앉아보고, 혼자 요리하고, 혼자 청소하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정리하고, 혼자 궁리하는 모든 혼자 살림들은, 둘이 나눠 하지 않기 때문에 고스란히 나의 성취로 온다. 혼자 사는 일이 좋은 것만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렇게 아주 좋은 점이 있는 것이다.

아니, 근데, 지난주에 새로 산 식칼은 어디로 갔느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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