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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명의 순간,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기 직전의 순간입니다.
ⓒ 박철
아침 산행을 다녀와서 샤워를 하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몸은 날아갈 듯이 가볍고 머리는 맑습니다. 방안은 환한 가을 햇살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마음도 환해집니다. 그 때 밖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메르치이 젓 담으시이소."

지금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있지만,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이따금 아침이면 듣게 되는 소리입니다. '멸치 젓 담으라'는 멸치장사의 확성기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듣기 싫지는 않습니다. 멸치 장사아주머니의 걸죽한 목소리에서 삶의 깊은 애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이 초등학교와 담하나 사이로 있는 중학교 앞에 있어서, 아침이면 등교하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로 왁자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온갖 소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부산에 이사 온 지 만 2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달 거의 깊은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집이 바로 신작로 옆이어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오토바이 소리, 슈퍼에서 고함지르며 싸우는 소리, 낮과 밤이 구별이 없습니다. 시골생활 20년 동안, 한밤중이면 벌레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소음과 거리가 먼 곳에 살다가 온갖 잡음과 소음 한복판에 들어와 살자니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동안 우리집은 밤 9시면 모두 잠자리에 들어 새벽에 일어나는 생활을 했었습니다. 새벽형 스타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선 밤 9시면 초저녁이었습니다. 밤 9시에 전깃불을 끄고 잠을 잔다는 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일단 온갖 소음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동안 불면의 상태로 지내다가 터득한 것이 있습니다. 저절로 소음에 익숙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억지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제 몸이 저절로 그렇게 따라 움직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취침 시간이 30여분 늦어졌을 뿐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는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도시는 그야말로 소리, 소음과의 전쟁터를 방불케 합니다. 온갖 요란한 소리들이 난무합니다.

▲ 가을햇살이 눈부신 아침입니다. 나무는 이제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 박철
아침 구봉산에 오르면 제일 못마땅한 것이 있습니다.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명상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산에 올 때 라디오를 허리춤에 차고 온다는 것입니다. 아침 좋은 공기, 좋은 물을 마시러 왔으면, 또 자연이 주는 소리를 듣고 가야 할 텐데 라디오 볼륨을 크게 하고 뉴스를 듣는다든지 뽕짝 음악을 듣습니다. 그것도 다 자기 멋이고 자유라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라디오에서 무슨 좋은 소리가 나온다고 그걸 듣고 산속에까지 와서 들을까 마땅치 않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1970년대 초반의 일이군요. 친구 둘을 꼬드겨서 15박 16일 동해안으로 무전여행 비슷하게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여름 장마가 겹쳐서 강릉 어느 허름한 여인숙에서 이틀을 묵고, 잠깐 해가 비치자 버스를 타고 처음 간 곳이 낙산사였습니다.

얼굴엔 여드름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녀석들이 교련복에 배낭을 메고 호기있게 낙산사에 올랐습니다. 그때 바다를 처음 보았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낙산사 경내를 둘러보려고 밤길을 옮기는데 한 여름 도끼로 나무 장작을 패고 있던 젊은 스님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우리 일행을 쏘아보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경건한 경내에서 이 무슨 짓이오, 라디오 소릴 끄시오."

그때 트랜지스터 라디오, 지금으로 치면 웬만한 노트북 컴퓨터보다 두께가 더 큰 라디오를 들고 다녔는데, 팝송을 크게 틀고 절 구경한다고 들어갔다 꾸지람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 스님이 무슨 운동을 했는지 팔뚝 근육이 튀어나왔고 우락부락하게 생겼는데 잠시 공포분위기를 느꼈습니다. 멋쩍기도 하고 애매한 기분으로 도망치듯 낙산사를 빠져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 숲에는 어둠이 물러가고 밝음이 찾아왔습니다.
ⓒ 박철
아침 산행길 마음을 모으고 가만 있으면 자연이 주는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하나 세어 보았더니 대략 6-7가지 소리가 들리더군요. 매미 소리, 쓰르라미 소리,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불규칙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 청설모가 나무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소리, 샘물 떨어지는 소리, 딱따구리 소리, 사람들 발걸음 소리 등등 도시 한복판 숲 속에서 이런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죠.

지금 나는 자연이 주는 소리와 온갖 인위적(기계문명) 소리 사이에 엉거주춤 서 있습니다. 자연의 소리를 귀담아 듣되 인위적 소리도 들어 줄만큼 제 몸이 익숙해지길 바랄 따름입니다. 어차피 도시에 들어와 살면서 소음을 피해 살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고 마음의 창을 꽁꽁 닫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니 그저 몸이 가는대로 마음 편하게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메르치이 젓 담으시이소."

멸치 장사 아주머니가 또 오셨네요. 김장철도 가까오니 아내 보고 생멸치 좀 사자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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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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