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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꽃> 표지
ⓒ 자음과모음
<불꽃>(자음과 모음, 2006)은 우리나라 대표적 무용가이자, 아시아 최고의 춤꾼으로 꼽혔던 최승희의 자서전이다.

가난한 어린시절과 처음으로 무용을 접하게 된 사연, 무용가로서 한창 활동하던 청년기까지의 육필원고 11편이 담겨있다. 1부 ‘영혼의 몸짓’에 최승희가 직접 쓴 회고록과 오빠 최승일과 주고받은 편지가 실렸다. 2부 ‘민족혼의 승화’에는 최승희가 활동하던 당시 국내외 언론인, 예술인들의 최승희 무용평론이 실렸다.

이 책 <불꽃>은 1936년에 나왔던 최승희 자서전 <나의 자서전>의 판권을 출판사가 북한에 거주하는 최승희 친척으로부터 사들여 70년 만에 다시 발간한 것이다. 최승희가 무용가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던 청년기의 고뇌가 담겨있지만, 이후 삶은 볼 수 없어 다소 아쉬운 감이 있다.

최승희의 삶은 책 제목처럼 ‘불꽃’ 그 자체였다. 그는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가난과 배고픔 속에 어린시절을 보내고, 일본으로 건너가 현대무용을 최초로 배운 조선여성이 된다. 타고난 재능과 불굴의 의지로 아시아 최고의 춤꾼으로 찬사 받으며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1941년 급기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요당하고, 민족혼은 위기에 처한다. 당시 저명한 조선인 예술가나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최승희의 예술혼도 제국주의 올무에 묶이게 된다.

일제는 최승희를 홍보도구로 삼아 전선위문공연을 다니게 했고, 이때의 활동이 친일행적으로 남아 최승희 인생에 큰 오점이 된다. 해방 후 그는 활동무대였던 경성을 떠나 월북한다. 친일행적이 걸림돌이 되었으나,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였던 남편 안막이 월북하였기 때문에 그도 뒤이어 1947년 북으로 간다.

대중예술 고급화에 기여한 최승희

▲ 최승희와 남편 안막, 그리고 딸 승자
ⓒ 자음과모음
북으로 간 최승희는 승승장구한다. 1950년 소련대륙 순회공연을 하며 명성을 드높였고, 1951년에는 중국 공연예술대 무용과 교수가 된다. 1952년 공훈배우가 되고, 1955년 인민배우 반열에 오르고, 195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적 입지도 탄탄해진다. 이때 최승희-안막 부부는 인생의 절정기를 누린다. 그러나 1958년 안막이 숙청당하면서 최승희의 인생도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걷는다.

무대를 빼앗긴 최승희는 활발한 저작활동으로 남은 생을 불태운다. 1964년 <조선아동무용기본>을 발간하였고, 1966년에는 문학신문에 <조선무용동작과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69년 그녀에게도 숙청의 총구가 다가왔고, 같은 해 8월 8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승희의 불꽃같은 삶을 일관되게 지배했던 것은 조선인이라는 자부심과 조선춤에 대한 무한한 애정, 그리고 변화를 꾀하는 눈물겨운 창작의 노력이었다. 그녀와 동시대를 산 평론가들은 그녀가 가진 무용가로서의 첫째 장점으로 훌륭한 신체적 조건을 꼽는다. 최승희는 신장이 170센티미터로, 당시 남자들보다도 큰 키였다. 그녀는 타고난 몸매로 무대에서 유연하면서도 다이내믹한 동작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최승희의 업적은 대중예술을 고급화의 경지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당시 대중들은 무용을 문학이나 미술과 같이 창조적 예술로서 인식하지 못했고, 그저 술자리에서 기생들이나 추는 춤쯤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최승희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어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부모는 ‘집안이 어려워 딸을 기생으로 팔아넘겼다’는 조롱도 받아야했다.

“오늘날에 와서 조선의 무용이란 겨우 그 빈사의 상태를 기생들에 의하여 주석 같은데서나 명맥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 무용이라고 할 만한 존재도, 그리고 거기에 대한 관련 문헌도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현실입니다. … 나의 조선풍 무용이라는 것은 조선에 남아있는 적은 것을 소재로 삼는다든지 또는 새롭게 창조하여 무대 위에서 이를 소화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나의 조선풍 무용이라는 것은 완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마는 나는 내가 하는 무용 속에서 동양적인 빛과 향기를 캐내어 찾아보자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또한 그곳에 나의 예술의 본의가 숨어있는 것이며, 내가 일생을 바쳐 걸어 나갈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 나는 이 기회에 세계무대에서 조선무용의 민속무용으로서의 양식화를 세계인에게 널리 보여주겠습니다.” (책본문 82-83쪽)


▲ 1942년에 발표한 장고춤
ⓒ 자음과모음
최승희는 일본인에게서 서양무용을 배웠으나, 그녀의 관심사는 온통 조선무용이었다. 그는 잊혀져가는 조선의 춤을 수준 높은 예술로 재창조하여 빛나는 민족혼을 담아내었고, 학문적으로 정리하여 후세에 남겼다.

친일행적과 월북 문제로 오랫동안 우리사회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최근들어 그녀와 그녀의 춤을 기리고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승희의 열정은 다음 글귀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반드시 우리 동양적인 빛과 향기를 세계인들에게 널리 보여줄 것을 믿습니다. 지금부터 벌써 내 전신의 근육은 긴장되고 있습니다.” (책본문 84쪽)

덧붙이는 글 | 최승희 지음 <불꽃> 2006년 자음과 모음 출간, 값11,000원


불꽃 - 1911~1969, 세기의 춤꾼 최승희 자서전

최승희 지음, 자음과모음(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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