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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바람의 사원
포스터, 바람의 사원 ⓒ 소마미술관
조각이 흐르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조각은 인류 옆에 있어왔다. 흙으로 빚어 굽거나 돌이나 청동의 단단한 부동물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회화가 평면이라면 조각은 입체이며 한 눈에 보지 못하고 돌아봐야한다는 점에서 2차원적 미술과 구분되는 3차원적 특징을 지녔다.

그러나 현대 조각에는 더 이상 위와 같은 대분류도 적용되지 않을 듯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팝아티스트, 미니멀 아트, 랜드 아트 등이 조각개념을 변화시킨 이후 조각에는 미디어가 도입되어 4차원적인 설치미술의 경계까지 넘나들고 있다. 단단했던 조각이 바야흐로 정지를 멈추고 흐르는 시대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40대 전후의 한국 작가들의 조각을 모아보면 어떨까. 서울올림픽 공원 안의 소마미술관에서 2006년 9월 14일부터 11월 2일까지 이들을 모아 <부드러움 전>을 연다.

2004년 9월 개관한 소마미술관(SOMA:Seoul Olimpic Museum Of Art)은 43만여 평의 녹지로 이루어진 앞마당에 210여점의 작품과 조형물을 설치하고 있다. 세계 5대 조각 공원 중 하나로 꼽히는 서울올림픽 공원 안에 위치한 소마미술관의 이름은 몸과 신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이기도 하다. 조각의 정통성을 담지 하는 듯한 소마 미술관이다. 이번 가을에는 정형성의 한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부드러운 충격을 가을의 관람객에게 선사한다.

부드러움은 다양한 거야

translation Buddha 비누로 조각된 상
translation Buddha 비누로 조각된 상 ⓒ 소마미술관
부드러움은 단순히 재질적인 측면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신미경의 < translation Buddha >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듯하지만 사실 비누조각이다. 작가는 영국 유학시절 서양 조각상의 대리석 표면이 오랜 세월 손길에 조금씩 닳는 것에서 영감을 얻어 1997년 이래 꾸준히 비누조각을 해오고 있다.

비누로 만들어진 보살상은 구멍이 뚫린 가운데에서 향을 맡을 수 있다. 미술관의 화장실에는 실제로 이 보살상이 놓여있어 자유자재로 녹이고 매만질 수 있다. 조각이 예술의 영역에서 생활의 영역으로 쉽게 침입한다.

정광호 作 철사로 만든 항아리
정광호 作 철사로 만든 항아리 ⓒ 소마미술관
1990년대에 일상의 오브제를 모은 작품을 발표하던 정광호는 2000년대에 들어 구리나 황동으로 된 선으로 나뭇잎, 항아리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뭇잎의 잎맥과 항아리의 깨진 금 등의 선을 따라 나간다는 점에서 회화에 가깝게 느껴지는 작품을 작가 자신은 '비-조각'이라고 명명한다.

윤난지 평론가의 평론을 빌리면 이는 그러나 부정을 통한 성찰이며 철저히 조각적인 것으로 새로운 형태의 조각을 긍정하는 발상이다. < The Leaf66152 >는 텅 비어 가볍게 설치된 채 조명 아래 미세하게 드리우는 그림자까지 관람객의 조각에 대한 무거운 시각적 경험을 일순간에 해체하고 새로운 시공간감으로 빈 자리를 대신한다.

김윤수는 오랫동안 골판지, 붕대, 종이 등의 부드러운 재료를 감거나 쌓아올리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바람의 사원>에서는 지인 50여 명의 발도장을 받아 비닐에 대고 오렸다. 이것을 다시 비닐에 대고 오리는 작업을 80여 차례 반복하여 비스듬히 쌓아올렸다. 투명한 푸른 비닐은 중첩되어 회화의 농담을 드러낸다.

크기가 다른 발자국이 수십 개 찍혀있는 하얀 방을 거닐면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한 원시의 사원에서 푸른 발자국 농담의 결을 따라 사라질 듯한 이질적인 공간감이 든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왜 발바닥이냐는 질문에 "인간이 세상과 가장 근접하여 있는 부분이며 나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면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문신 예술가로 알려진 김준은 <반야심경>이라는 미디어 작품을 선보인다. 불교의 이미지가 새겨진 사람의 살갗은 숨구멍을 통해 숨을 쉬다가 폭발하는 등의 변화를 품고 있다. 사회적으로 금기되는 문신을 통해 관습과 기득권에 저항하는 통렬한 작품들을 선보였던 작가이다.

문신 주위로 버블이 터져 나왔다 사라지는 격렬한 호흡을 통해 생존을 억압하는 가학적 현실을 재현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소녀가 그려진 살갗에서보다 불교적 이미지가 그려진 살갗에서 격렬함이 덜하고 호흡이 고르다는 큐레이터의 설명이 흥미롭다.

화선지가 된 광목과 묵이 된 쇳가루

김종구 作 모바일 풍경
김종구 作 모바일 풍경 ⓒ 소마미술관
조각에 미디어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모자라 맞은편에는 쇳가루로 그린 디지털 수묵화에 프로젝터가 연결되어 작품 위를 거니는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비춘다. 1996년 영국 루이스의 야외조각전에 출품한 통쇠 연작 시리즈가 사라지고 통쇠를 깎을 때 나온 쇳가루만 남아있었던 해프닝을 계기로 김종구는 '쇳가루 수묵'을 그리기 시작했다.

광목천이 화선지 구실을 하고 쇳가루가 묵이 되었다. 쇳가루의 높낮이는 산수가 되어 화면에 나타난다. 철은 해체되어 쇳가루라는 질료로 사용된다. 이에 산수라는 전통적인 소재를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형식을 통해 <모바일 풍경>에 담아낸다.

우순옥의 <꽃>은 물에 비쳐 상하 대칭을 이루는 산수를 DVD 영상으로 담아낸다.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해 "흙", "어머니의 가슴"이라고 조근 조근 이야기하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존재보다 부재가 과시보다 침묵에 익숙하다는 과작(寡作)의 작가라는 평처럼 평온하고 조용한 공간을 창조한다.

오브제는 사라졌지만 공간 자체를 옮겨놓은 작가의 의도는 2000년 <한옥 프로젝트-어떤 은유들>에서 그러했듯이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에게 향수와 더불어 여유의 시공간을 제공한다.

종이, 석고, 스테인리스 스틸을 경쾌하게

황혜선 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여기
황혜선 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여기 ⓒ 소마미술관
황혜선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여기>는 소마 미술관 내부의 유리벽을 활용했다. 실크스크린 작품의 작업을 통해 미술의 전통을 현명하게 뒤트는 재치를 보여 왔던 작가이다. 유리벽의 이 편과 저 편에 그려진 흰 선의 정물과 풍경은 겹쳐져 하나의 입체적 풍경을 형상화한다.

결혼 후 느낀 일상의 평안함을 전달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큐레이터의 설명으로 곁들여진다. 소파와 책의 정적인 분위기와 창 밖의 산 가운데로 펼쳐진 넓은 도로는 머무름과 떠남의 동시성을 표현하는데 현대조각에서 느껴지는 유동성을 관람객의 마음에 불러일으킨다.

계단을 내려오는 공간에는 정재철의 <천막들>이 걸려있다. 일상에서 흔히 쓰다 버리는 실용적인 현수막들은 정재철에 의해 거두어들여져 실크로드를 따라 이국의 공간에 뿌려진다. 여러 나라에서 각기의 방식대로 사용되어진 현수막은 다시 작가의 손에 의해 하나의 화폭으로 재탄생한다.

소비사회의 광고로 기능하는 다양한 현수막은 문화적 차이에 따라 변용된다. 이를 새로 모아 하나로 통합한 정재철은 2000년대 들어 시작한 여행을 통한 일상에의 조명을 <실크로드 맵>의 행적에 기록한다.

어렸을 때 상상 속에서 당시 본인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왔다는 목진요는 2000년 5월부터 작업해온 <뮤직박스 프로젝트>의 한 작품을 선보인다. LED판과 컴퓨터로 뮤직박스를 만들어온 그는 다른 사람과 이를 나누는 인터랙티브 워크에 관심을 가졌다.

키보드와 마우스, 조그만 돌리는 통으로 조작을 하면 관람객이 그린 그림을 따라 높낮이가 다른 음이 연주된다. 빠르게 돌리면 음악이 되는 원리이다.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대안적인 소통의 양식을 하나 던져보고 싶었다는 작가의 상상이 빠르고 친숙하게 관람객의 흥미를 빨아들인다.

마지막 전시룸에는 이용백의 < Angel-soldier >가 현란한 꽃이 화려하게 펼쳐진 커다란 화폭으로 벽의 한 면을 장식한다. 오색찬란한 꽃의 평화 속에는 총기를 소지한 군인이 위장 잠복해 있는데 언뜻 보아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교묘하다.

천사이자 군인인 이들은 관람객을 향해 총을 겨눌 수도 있지만 관람객의 공간을 지키기도 하는 양면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위치가 역할을 결정하는 셈이다. 이용백은 광복 60주년 기념 '베를린에서 DMZ까지' 전시에서 꽃무늬 군복을 선보인 바 있다.

김주현 作 <원터치 조각> 가벼워보이지만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김주현 作 <원터치 조각> 가벼워보이지만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 소마미술관
종이, 석고, 스테인리스 스틸 등의 재료를 본래의 무게와는 무관하게 경쾌하게 승화시키는 김주현의 시도는 <원터치 조각>에서도 드러난다. 쿠션을 던져놓은 듯 가볍고 폭신폭신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딱딱하고 무거운 대리석이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부드러움'에 대한 기표와 기의는 단순하게 뒤집히며 관람객의 기대를 배반한다. 미니멀아트처럼 단순하지만 내면에 숨겨진 복잡다단함은 2004년 <복잡성 법칙에 관한 연구>를 연상케 한다.

김홍석은 <베리코리안 컴플렉스>를 연출한다. <와일드 코리아>는 단편 독립영화로 총기소지가 합법화된 한국의 가상적 상황을 연출하였다. 민주주의를 극단화하기 위해 도입된 총기소지합법화는 시민단체 간의 분열을 가져오고 해묵은 색깔논쟁을 재연한다.

얼굴이 빨갛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이후 새파랗게 질려버렸다는 이야기는 식상함과 피로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의도이기도 하다.

재료의 무한대, 비디오와 테크놀로지, 장르해체

<부드러움 전>은 재료의 무한대, 비디오와 테크놀로지의 활용, 장르해체와 퓨전을 골고루 보여준다. 1980년대 민중미술과 미니멀리즘 미술로 양분되었던 화단의 틈새에서 부상한 작가들이 다양하게 재현한다. 만화에서 쇳가루까지 재료와 형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들은 외국 유학파가 대다수로 세계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을 재빠르게 포착하는 경향이 있다.

조각공원에 가족들이 모두 함께 타고 달릴 수 있는 자전거가 대여되는 올림픽 공원, 올 가을엔 딱딱하게 뭉친 근육을 풀어내기에 적정한 상상의 공간을 방문해 보자. '부드러움'에 대한 딱딱한 상상을 부드럽게 깨부수는 것이 관람의 첫걸음이 되어야 할 듯.

덧붙이는 글 | SBS U-포터에도 송고합니다  

부드러움(Budro_um : Softness) 
2006-09-14 ~ 2006-11-02 
10:00 ~ 18:00 
소마미술관 
 425-1077 
 425-1077 
 소마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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