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만에 지리산을 찾은 셈이다. 1982년 대학 1년 때 처음으로 칠선계곡을 타고 천왕봉에 올라 장터목에서 세석평전을 거쳐 하산한 뒤, 다시 지리산 본류를 찾은 감회는 흐른 세월만큼 깊었다.
간혹 노고단에 올라 '언제 가볼까?'라는 상념을 하곤 차를 타고 돌거나, 뱀사골이나 피아골 등 지리산 근처를 맴돌곤 하였다. 이번 한가위 연휴가 긴 덕분에 10월 7일~8일 비박산행을 감행하였다.
전북 인월 백무동야영지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백무동계곡을 타고 장터목산장까지 5.8km를 야간산행했다. 가는 길에 인적에 놀란 멧돼지의 괴성에 가슴 뛰었지만 깊은 산중계곡의 밝은 달이 벗님처럼 따라와 이내 안심했다. 좌우혼란의 시절, 이 계곡을 타던 '밤손님'들은 어땠을까? 저 달은 그 때처럼 빛나고 있는데 다만 손님들만 달라진 것일까?
마침내 장터목산장에 도착하여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해돋이의 비경에 사무쳤다. 가을산이라 한기가 돌아 오싹하였지만 등산객들의 입에서 저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3대가 업을 잘 쌓아야 지리산의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데 그 빛나는 비경을 보았고 황홀함에 빠졌다. 지치고 야위어진 심신을 달래려고 온 24년만의 산행에서 마치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장터목의 해돋이에 사무쳤다.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 올라 드넓고 웅장한 산자락에 내 뼈 속 깊이 스며든 삶의 묵은 때와 허물을 다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다. 어쩌면 그 바람은 나만의 욕심이었을 터이다. 다시 장터목에 내려와 연하봉과 촛대봉을 거쳐 세석평전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에게 자문한 이 '마음의 산행'에서 내린 결론은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 덧없음을 어이 하랴!'였다. 세석에서 웅장하고 깎아지를 듯한 한신계곡을 타고 다시 백무동야영지로 돌아오는 하산길에 더욱 깊이 새겨진 결론 또한 그것이었다.
13시간, 19.1km에 걸친 비박산행은 그렇게 '마음의 밭'을 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