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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경쟁부문에 출품한 북한 영화 <한 녀학생의 일기>, <평양 날파람>의 배우들과 함께 한 리카르도 젤리.
ⓒ 리카르도 젤리

"북한 영화를 볼려면 평양에 한 번 다녀와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평양영화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영화제 참가 신청서를 보냈죠. 그런데, 북한 정부에서 심사위원으로 와 줄 수 있겠냐고 물어오는 거예요."


북한에도 국제영화제가 열린다. 평양국제영화축전. 2년마다 열리는 이 영화제에 지난달 다녀온 이탈리아 사람이 있다길래 만나봤다.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주와 피렌체시가 공동주최하는 '피렌체 한국영화제'의 조직위원장인 리카르도 젤리는 이미 서울을 여러 번 방문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번이 처음이라 낯설기만 했단다.

그는 지난달 13일부터 22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10차 평양국제영화축전에 심사위원으로 초빙되어 다녀왔다. 러시아의 갈리나 예브투센코 감독과 중국의 왕호위 감독, 독일의 한스 융커스토프 영화사 사장, 북한의 강원부 문화성 영화심의위원회 부위원장 등도 같이 심사위원으로 초빙됐다.

그는 "평양국제영화축전이 지난 대회까지는 비동맹국가들로 참가자격을 제한했으나 이번부터는 전세계 모든 국가들에 문을 열었다"며 "미사일 발사 이후 고립되었던 북한이 변화를 모색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출품된 북한의 영화들이 과거의 영화들에 비해 감동적이지 못했다"며 1년에 겨우 2편 밖에 못 찍는 북한 영화 현실을 안타까워 했으나, "북한의 만화 산업은 낮은 견적에 비해 품질이 뛰어나 서방국가들로부터 지속적인 수주를 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북한 당국이 최근 남한에서 타계한 신상옥 감독에 대해 "반역자"라며 언급하기조차 꺼리면서도 비디오 가게에서 그의 작품을 파는 아이러니를 토로하기도 했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 젊은이의 집에서 열린 축하공연.
ⓒ 리카르도 젤리

"외국사람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서울이나 평양이나..."

- 평양은 이번 방문이 처음이라던데 첫 느낌이 어땠나.
"도시가 현대적이라는 것이었어요. 물론 한 나라의 수도이니까 잘 가꿔놓았겠지만, 자동차도 있고 버스도 있고… 버스를 기다리며 줄 서 있는 사람들도 있고 외국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신기해 하는 것은 서울이나 별 차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았어요. 낮이나 밤이나 걸어다녀요. 버스표를 살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버스가 자주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녀요.

재미있는 것은 밤이에요. 전력난 때문인지 가로등은 있는데 불을 안 켜놓더라구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손전등으로 앞을 비추며 걸어가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평양소주는 남한 소주보다 맛이 더 진하더라구요. 제 입맛에는 더 어울렸어요. '북한'이라고 말했다가 혼쭐이 날 뻔한 적도 있어요. '조선'이라고 불러달라고 하더군요."

- 북한이 당신을 심사위원으로 초대한 이유는.
"피렌체 한국영화제가 올해 4년째입니다. 한국 영화만 가지고 영화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소개할 내용이 많다는 것인데 그러면서 궁금한 게 생겼어요. 북한 영화에 대해서죠. 북한 영화를 구해볼 요령으로 평양의 Korfilm(조선영화수출입사)에 문의한 적도 있었어요.

북한 영화를 볼려면 평양에 한 번 다녀와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평양영화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영화제 참가 신청서를 보냈죠. 그런데, 북한 정부에서 심사위원으로 와 줄 수 있겠냐고 물어오는 거예요."

▲ 평양영화축전이 열리는 평양국제영화회관에 걸려있는 영화포스터들.
ⓒ 리카르도 젤리
"감독보다 시나리오 작가가 더 대접받는 것 같아요"

- 이번에 상영된 북한 영화 중 특히 <평양날파람>은 빠른 화면처리에 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제작 지침을 수용, 구한말 정통무예인 택견을 말살하려는 일본 사무라이에 맞서 싸우는 평양 무술인의 활약을 속도감 있게 그린 작품이라고 평하던데, 북한 영화가 국제적인 수준이라고 생각하나.
"이번 평양체류 기간 동안 북한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었어요. 영화제에 출품된 영화 뿐만 아니라 남는 시간에 호텔 텔레비전에서 끊임없이 북한 영화를 해주더라구요. 물론 한국어를 말하고 듣는 것은 불가능하고 읽을 줄만 아는 저에게 북한 말은 더 어려웠지만 영화를 영화로서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보았지요.

영화제에서 본 북한영화는 두 편의 영화였어요. <한 녀학생의 일기>와 <평양 날파람>인데 북한은 올해 이 두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들은 제게 별 다른 감동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48년 만들어졌던 <철길우에서>나 <피바다> 같은 영화들이 훨씬 감동적이었어요.

질적으로도 국제무대에 내놓을 수 있는 영화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촬영구도나 배우의 연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 영화를 보면 꼭 그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감독의 영향이 아주 미미하다는 거예요.

영화는 감독이 리드하여 만들어나가는 것이 보통이잖아요. 그런데 북한 영화 포스터를 보면 감독은 맨 아래 아주 작게 돼있고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제일 위에 선명하게 쓰여 있지요. 48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현장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개짖는 소리가 나올 때는 성우의 목소리가 줄어들면서 개의 소리가 커지죠."

- 다른 국제 영화제에 비해 다른 점이 있던가.
"북한은 독특한 나라 사정을 가지고 있고 외국인들도 이를 알고 참석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제 개막식엔 외국인 100여명이 참석했어요. 국제 영화제 형식을 빌렸지만 미국이나 남한영화는 한 편도 없었어요. 아무래도 정치적인 국제 관계가 영화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여요.

그렇지만 이런 영화제는 북한 시민들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북한에서 상영되는 외국 영화는 기껏해야 베트남이나 중국, 러시아 영화들이고 서양영화를 볼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이번 영화제를 통해 서양영화를 볼 수 있었지요. 영화제가 열리는 평양국제영화회관에는 5개의 영화관이 있었고 가장 큰 영화관은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화관인데 날마다 표를 끊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니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관객 입장이 끝나면 영화관 문을 자물쇠로 잠가버려요. 이유를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만약 불이라도 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아요. 주최측이 이해가 가지 않더라구요."

"디즈니가 북한에 만화영화 발주하는 것 알아요?"

▲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 유람선 위에서 북한 악단이 재즈를 연주하고 있다.
ⓒ 리카르도 젤리
- 지난 9회 대회까지는 블록에 가담하지 않은 개발도상 국가들만 참가가 가능했는데, 이번 대회부터 모든 나라에 문을 연 이유가 무언가.
"미사일 사태 이후 국제사회에 고립됐던 북한의 분위기도 한몫 했다고 생각해요. 북한 영화를 국제 무대에 내놓겠다는 야심으로 보여요. 영화제는 영화제작에 신선한 자극을 주지요.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구요. 북한 영화가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을 지는 앞으로 두고 보아야겠지만요.

북한은 만화영화에 우수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요. 디즈니가 북한에 발주를 주고 있을 정도이니까요. 물론 직접적인 접촉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이탈리아는 북한과 많은 일을 하고 있더군요. 'SEK'이라고 불리우는 디자인 회사는 5층 건물에 1500명의 북한 디자이너들이 일하고 있는 곳이죠. 이들은 김일성 대학을 졸업한 뒤 하루 8시간 노동을 하며 한 달에 10유로화를 받고 1년에 7천분의 만화를 제작합니다.

이탈리아 만화 영화 제작자가 북한과 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적은 비용으로 제때 작업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인데 26분짜리 26회 TV용 만화영화를 제작하는데 500만유로를 북한에 지불했다고 하니까요. 이 가격은 중국이나 다른 경쟁 국가들의 견적에 비하면 3분의 1 가격이죠.

낮은 견적이 경쟁에서 좋은 입지를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물이 다른 경쟁 국가들의 수준 보다 떨어지지 않는다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고 봐요. 정확성, 디자이너들의 능력이 뒷받침 하지 않는다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지요. 이탈리아는 앞으로도 발주를 계속 줄 것으로 알고 있어요."

▲ 영화축전 참가단을 취재하고 있는 북한 기자들.
ⓒ 리카르도 젤리
"영화제 통해 외국자본 끌어들일 수 있을까"

- 제10차 평양국제 영화축전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나토나 소비에트 블록에 참여했던 나라들은 지금까지 참여할 수 없었던 반면 이젠 누구나 참여할 수가 있지요. 독일은 북한에 문화원을 만들면서까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남산에 있는 괴테하우스 같은 거 말이에요. 이번 영화제 행사에도 주요 후원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호텔 TV에서 BBC, 중국, 러시아 방송을 보여주는 것만 보더라도 북한은 여전히 중국이나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봐야지요. 변화는 위기에 대한 모색으로 보여집니다.

이런 행사를 통해 외국자본을 평양에 끌어들이고 그리고 곧 문화상품으로 연결지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프로모션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감이 없는 것 같았어요.

Korfilm(조선영화수출입사)는 신상옥에 대해서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더군요. '반역자'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신상옥 영화는 한 편도 보여줄 수가 없다고 했는데 일반 비디오 가게에서 <춘향 사랑 내 사랑>을 팔더라구요. 아이러니였습니다."

지난 87년부터 2년 주기로 열리고 있는 이 영화제는 올해 38개국으로부터 73편의 영화가 출품돼 장편예술영화경쟁, TV프로그램경쟁, 비경쟁, 특별상영 등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출품작들을 보면 <소림축구(Shaolin Soccer, 홍콩)> <베른의 기적(The Miracle of Bern, 독일)> <빈선생(Bean, 영국)> 등 해외 흥행작과 <파도(Wave, 이탈리아)> <비밀(Hidden, 프랑스) <투틀타브와 지로(Tootletubs and Jyro, 핀란드)> 등 출품작들이 있었다.

이밖에도 스리랑카, 베트남, 인도, 이집트, 러시아, 중국, 스위스, 쿠바, 남아프리카, 체코, 캄보디아 등의 나라들이 참여했다.

▲ 5명의 심사위원들이 김일성기념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중국의 왕호위 감독, 한스 에버하드 융커스토프 사장, 갈리나 예브두센코 감독, 리카르도 젤리, 강원부 부위원장.
ⓒ 리카로도 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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