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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자 할머니의 인생은 한일관계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교과서였다.
문광자 할머니의 인생은 한일관계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교과서였다. ⓒ 허재철
우토로. 최근 국내 언론에 종종 보도되면서 한일역사 및 인권차원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뤄지고 있는 곳이다. 일본 교토부 우치시에 위치해 있는 우토로. 단순한 정치적, 인권적 소재가 아닌 이곳을 삶의 터전, 고향, 생명과 같이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한 노인이 있다.

문광자 할머니, 1920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일본으로 건너왔다. 일본군에게 논밭을 빼앗긴 부모님과 여동생 남동생 등 모두 다섯 명이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그러나 살기 위해 건너온 일본에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에는 도쿄에서 15살까지 있었습니다. 일본인 집의 2층을 빌렸어요. 한국인(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자주 쫓겨나 도쿄에서는 6∼7번 정도 이사를 했습니다. 방을 빌리기 위해 여러 일본명을 사용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을 하는 날은 1주일에 2∼3회. 저도 12살 때부터 고무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우토로 사람들>, 1998년, 아사히신문사, 인용)

일거리가 없었던 그녀의 가족은 오사카에 살고 있는 친척의 권유로 일자리를 찾아 오사카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은 얼마 후 징집명령을 받게 되었다. 남편은 교토에 있는 우토로 비행장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면 징집을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데리고 이곳으로 왔는데 그것이 이곳에서의 삶의 시작이었다.

할머니가 우토로로 온 당시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조선인이 하는 일은 다 힘든 일 뿐이었죠. 여기 온 사람 중에 고생 안한 사람 한 명도 없어요. 그리고 미국 비행기가 날아오면 방공호에 숨느라 일도 못했어요. 밤낮없이 비행기가 날아왔죠.”

우토로는 당시 비행장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합숙소였다. 말이 합숙소지 천정은 없고 지붕은 삼나무 껍데기로 붙여 만들어 밤에는 별이 보이고, 비가 오면 비를 피하며 잠을 자야 했던 곳이다. 지금도 그때 당시의 가건물이 몇 개소 남아 있다.

1940년대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이 살던 거주지가 아직도 남아있다.
1940년대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이 살던 거주지가 아직도 남아있다. ⓒ 허재철

“전쟁이 끝나고 다들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근데 저는 돈도 없고, 가족도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남았지요.”

이 이유로 남게 된 것이 지금 60여년이 흘렀다. 한국의 해방 후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미군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다. 그 미군에 대한 정체성은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해방을 맞이한 재일 한국인(조선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니깐 미군들이 총을 들고 와서 이곳에서 나가래요. 우리들은 싸웠어요.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미군들은 매일같이 찾아와 협박했죠. 동네의 영감 한 명은 미군이 쏜 총에 다리를 맞아 다리를 절며 살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에게 미군은 탐탁지 않은 존재로 느껴졌다. 전쟁은 끝나고 조국은 해방이 되었지만 일본에서의 할머니의 삶은 변한 게 없었다. 오히려 더욱 힘든 나날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홋카이도, 나고야 등으로 남자들은 일하러 떠났어요. 여자들은 여기서 일을 구했는데 여기서는 일이 없어 차잎 따는 일이나 했어요. 조선인은 좋은 일자리에 안 써줬어요. 당시는 배급이 있었는데 하루 배급량이 한 끼 먹어도 모자라는 양이었어요.”

이렇게 해서 겨우겨우 살아왔는데 이제는 이 고향 같은 우토로에서 나가라고 한다. 지금까지 여기서 살아왔고, 자식들도 여기에 있고, 한국인(조선인)들이 모여 있어 차별도 없는 이곳에서 계속 사는 것이 할머니의 꿈이라고 한다.

그녀에게 한국은 어떤 존재일까?

아직도 개발되고 있지 않은 왼쪽의 우토로가 오른쪽의 일본인 거주지와 비교된다
아직도 개발되고 있지 않은 왼쪽의 우토로가 오른쪽의 일본인 거주지와 비교된다 ⓒ 허재철
할머니에게 자신이 태어난 곳 한국은 어떤 존재일까?

“잘 몰라요.”

대답은 간단했다. 하지만 뭔가 느껴지게 하는 짧은 대답이었다. 할머니가 태어난 경상남도는 분명 한국의 땅이지만, 그녀는 한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 듯 보였다. 조국이 지금까지 재일교포인 자신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을 냉소로 표현한 것일까?

할머니는 여전히 분단전의 ‘조선’을 자신의 신분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한국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녀가 이곳 일본에서 조총련 활동을 했던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한다. 조선적을 가지고 총련활동을 하고 있던 그녀가 반공에 투철했던 군사정권시절 한국을 찾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할머니의 삶 속에는 한반도의 분단상황이 투영되어 있었다.

“한국에는 남동생이 살고 있는데, 지금 큰절에서 스님을 하고 있데요. 남동생은 여기 일본에서 태어났지요. 일본학교 졸업하고 높은 학교에 가고 싶어했는데 못 보냈더니 혼자서 없어져 버렸어요. 그리고 공화국에(북한) 동생이 살고 있는 덕분에 공화국에는 15번이나 가봤어요.”

이렇게 말하던 할머니는 통일이 되면 한국에 있는 고향에도 꼭 가보고 싶다고 강조했다. 기자가 마지막으로 꿈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여기서 계속 사는 것 이외에 할머니의 꿈은 무엇일까? 할머니의 나이를 생각해 적절한 질문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대답은 빨리 나왔다.

“빨리 통일이 돼야지!”

식민지 시대의 노동착취, 전후에도 이어진 조선인차별,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거주문제 등 아직 청소되지 않은 한일간의 역사의 찌꺼기가 아직도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음을 인터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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