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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 개마고원
한때 한국에는 이른바 진보담론을 형성하는 명 칼럼리스트들이 백가쟁명까진 아니더라도 필력과 내공을 과시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80년대의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타고난 부지런함과 진중한 역사의식에 기반해 명문들을 쏟아냈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쌍두마차는 강준만과 진중권이다. 그리고 도올이 있었고, 지금은 기득권에 편입해버린 유시민이 있었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운영, 리영희라는 거목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 자유주의자들보다 조금 더 좌측에는 박노자와 홍세화라는 좌파의 지성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적어도 이들이 앞다투어 글을 쓰던 시기에는 이른바 우파를 참칭하던 극우세력들의 글은 정말로 웃음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가장 큰 상징은 박정희 군주론을 썼던 조갑제의 책을 그대로 패러디한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이들에게 가리워 졌던, 그러나 내가 보기엔 이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칼럼니스트가 조용히 활동하고 있었다. 글의 아름다움으로 보나, 그 사상적 건강함으로 보나, 또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나 지적 충실함으로 보나, 그는 이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우뚝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글은 위의 사람들 같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들처럼 명쾌한 입장을 취하지 않은 채 기자출신답게 중도적인 글을 풀어갔던 이유가 클 것이다. 뜨뜻미지근한 것은 한국사람의 취향이 아니니까. 물론 이 기사의 부제만 봐도 여기서 내가 누구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가는 짐작할 것이다. 일단 이 정도만 언급하고 이야기를 계속하자.

신성동맹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궁금한가?

한때 중도파의 집권을 위해 암묵적으로 결합해 조선일보-한나라당 수구동맹과 싸우던 이들은 마침내 중도세력이 집권한 후 자신의 포지션을 뚜렷하게 하기 시작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한다.

일찌감치 방향을 틀어버린 고 정운영 선생은 제외한다면 맨 처음 강준만이 (정치적인 글에서)절필을 선언했고, 탄핵을 기점으로 진중권 역시 애매한 글쓰기로 인한 집중포화를 맞고 글쓸 동력을 잃어버린다.

박노자는 한국을 떠나면서부터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잃어버렸고, 유시민은 글을 쓰기에는 너무 정치에 깊숙하게 발을 담갔다. 도올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홍세화는 순결한 좌파로 남기 위해 스스로의 글을 자신의 틀에 가둬버렸다. 그의 글에서는 이제 파리를 누비던 운전사가 아닌 강고한 지사형 선비의 느낌이 너무 강하다.

결과적으로 이들 중 많은 수가 절필했거나, 예전같이 사람들의 가슴을 치고 양심을 뒤흔드는 글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한편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던 이 사람이 홀로 그런 글을 쓰고 있다. 그의 이름은 고종석이다. 그가 4년만에 시사평론집을 새로 내놓았다. <신성동맹과 같이 살기>(개마고원), 신성동맹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궁금한 이들은 책을 사보기 바란다.

아름다운 글을 쓰는 시사평론가 '고종석'

고종석 마저 없었다면 지금 '양심적인 우파의 상식적 극우비판'이나 '자유주의자의 신자유주의 비판'을 이처럼 명쾌한 언어로 풀어낼 사람은 없다. 물론 그도 지쳤다. 지금의 상황에서 지치지 않을 '상식을 가진 칼럼니스트'가 어디 있으랴? 그는 이번 책에서 강준만에 대한 (절필의) 아쉬움과 (떠날 수 있을 때 떠날 수 있는) 부러움을 동시에 풀어낸다. ('강준만 생각', 위의 책 69∼71페이지)

이처럼 회의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그는 밥벌이를 위해 이 글쓰기를 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그를 제외한 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이가 유일하게 남아있는데, 그것이 고종석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손바닥처럼 뒤집는 이도 아니다.

한때 입장을 같이하던 대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고무찬양이 아닌 비판적인 관점을 직필로 풀어놓는 이이며, 무엇보다 아름다운 글을 쓰는 (그가 대통령에 대한 시정잡배 풍의 비난으로 필화를 일으킨 동아일보의 '김순덕 칼럼' 등에 눈살을 찌푸리는 것- 같은 책 13페이지-은 극히 당연하다. 그는 이런 조악한 글을 견딜 수 없어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이며, 그것도 취미로 쓴 것이 아니라 이 책에도 나오듯 조선일보 문학상 후보로 올랐던 안티조선 작가이다. 그가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153페이지를 읽어보시라) 사람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어보고, 세상에 대한 눈을 틔우기를 기원하면서 부족하기 짝이 없는 책 소개라 할 수 없는 책 소개를 마친다.

덧붙이면 이 책은 수작이다. 그러나 그의 이전 책인 불후의 명저인 <서얼단상>이나 <자유의 무늬>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책이 좋았다면 반드시 두 책을 사서 읽어 보라. 특히 <서얼단상>은 시대를 지나쳐버린 시평집 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획득한 몇 안 되는 책이다.

그리고 김훈이 '부당하게' 독점해 버린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소설가'라는 칭호를 나눠 가질 자격이 충분함을 보여주는 그의 소설들도 읽어보시길.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 고종석 시평집

고종석 지음, 개마고원(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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