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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이미경 기자/사진 노민규 기자] "한국 사람들이 기록을 안 남긴다고 흔히 말하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을 보면 '기록 마니아'였습니다. 이순신 장군만 '난중일기'를 남긴 게 아니에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난중일기'를 남겼습니다. 17세기에 살았던 미암(眉巖) 유희춘이란 사람은 무려 11년 동안 일기를 썼습니다. 그걸 보면 어느 날 누가 무얼 선물로 주고 어떤 편지를 보내왔는지, 시시콜콜한 내용이 다 담겨 있습니다. 일기가 가계부와 신문의 역할을 겸하고 있을 정도로 소상해요."

민족문화추진회(이하 민추)의 김성애 국역실장(43)은 우리 고전이 좋아 다니던 대학원까지 때려치우고 이 길로 들어선 고전번역 전문가이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 동양고대사를 전공하던 그는 짧은 한문 실력을 갈고 닦아볼 요량으로 지난 1987년 민추가 운영하는 국역연수원에 입학했다가 우리 고전의 매력에 흠뻑 매료됐다고 한다.

"처음엔 한문을 고전을 이해하는 도구로 생각했죠. 그런데 공부하다 보니 동양문화의 한없이 깊고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친김에 국역연수원 3년 과정을 마치고 이어 상임연구원 생활을 2년(지금은 3년 과정임) 동안 했다.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 밤 9시까지 일할 정도로 열정을 쏟았던 시절이었다. 1992년 정식 직원으로 입사한 이래 꾸준히 앞만 보고 내달린 그는 지난 8월, 4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고전번역의 본산 민추에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실장 자리에 올랐다.

한문으로 된 고전의 번역은 한자만 안다고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이른바 문리(한문 구조의 이해)는 기본이요, 동양학 전반에 대한 교양이 있어야 하고, 필자에 대한 배경 지식도 확실해야 한다. 그래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지 않은 세대가 고전을 제대로 번역하려면 대략 10년은 걸린다는 것이 김 실장의 설명이었다. "그러다 보니 민추 신입사원의 평균연령은 35, 36세로 다른 회사나 기관에 비해 한참 높다"며 웃었다.

민추가 이미 한글로 번역해냈거나 번역 중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같은 조선왕실문서, 퇴계집, 동국이상국집 등의 사상서들은 왠지 너무 엄숙하고 현대 여성들의 정서와도 맞지 않을 것 같지만, 김 실장은 이 작업이 여성에게 잘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섬세함과 치밀함이 요구되는 번역 작업, 또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는 윤문 작업은 언어감각이 뛰어난 여성들이 오히려 잘한다는 것. 또 오로지 실력으로만 평가받기 때문에 억울하게 성 차별을 당하는 일도 없다고 전했다. 실제로 그가 국역연수원에서 한문을 익히던 시절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결혼·출산·육아문제로 중간에 포기하는 여성이 많아서 현재 민추에서 일하는 전문 인력 46명 중 여성은 3분의 1정도인 14명이다.

민추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2003년부터 자유출퇴근제도를 도입했다. 한 달에 어느 정도의 일을 한다는 업무량을 정하고 나면, 회사에 나와 일을 하든 집에서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직장이 보장된 프리랜서나 마찬가지"라고 김 실장은 이 제도를 소개했다. 이 제도 덕분에 한 주부 연구원은 지난 여름 일주일에 2~3시간만 사무실에 나와 업무 상황을 보고하고 심한 아토피 때문에 입원한 아이를 충분히 보살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육아휴직도 후한 편이다. 지난해 말에는 여직원 두 명이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출산한 뒤 6~7개월씩 육아휴직을 했다.

"이곳 사람들은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오히려 엄마가 아기를 키워야 한다는 데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이 빠지면 어렵기는 하지만, 외주를 활용하면서 꾸려갑니다."

민추가 한글로 펴낸 책은 천여 권으로 이제까지 국내에서 번역된 고전의 70%에 달한다. 그런데도 앞으로 번역해야 할 책이 지금 세워놓은 계획만 해도 백 년분에 달한다.

"승정원일기 1천8백여권, 일성록 5백여권, 각종 문집 2천5백권 등 한글로 번역하면 총 4천8백권에 이릅니다. 매해 50권씩 낸다고 해도 96년분이에요."

김 실장은 일반인들이 흥미를 갖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개발해달라는 출판사들의 요청이 끊이지 않지만, 인력 부족으로 해내지 못하는 게 무척 안타깝다고 말했다. 조선 정조 때 형조에서 발간한 '심리록' 같은 서적은 조선시대 범죄사를 담고 있어서 '혈의 누' 같은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될 거라고 그는 귀띔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영조 시절의 기생, 백정 이야기를 담은 '청송잡기'가 올해 안에 번역돼 나올 예정이라고 전했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그러나 과거 천 년 동안의 역사는 모두 한자로 쓰여져 있어 현대인들이 접근할 수가 없다. 국고보조금 사업으로 근근이 이어지고 있는 민추의 힘겨운 국역 작업이 정부의 보다 안정된 지원 아래 활기를 띄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김 실장의 가장 큰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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