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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변화에 잘 순응한 지리산 정령치 산 아래 밤나무들
계절의 변화에 잘 순응한 지리산 정령치 산 아래 밤나무들 ⓒ 박주현

정책 결정의 분업 구조 때문일까. 모든 게 따로 논다. 한미FTA, 전시작전통제권 등 국가적 이슈에 대한 보수·진보 간 대립이 끝이 없다. 게다가 지방은 수도권 규제완화 정책과 지역발전 특별법 등을 놓고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간 대결구도가 첨예하다.

중앙이건 지역이건 언론사마다 ‘희망을 말하기가 두렵다’는 표현을 주저 없이 사용한다. 소통이 부재한 탓이다. 소통채널이 없는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기 위해 가을이 오는 길목을 찾아 나섰다. 불안감의 확산을 통제하기 위해 시간의 흐름이 최대한 멈춘 곳을 향했다.

가을 색으로 갈아입는 지리산

지리산은 위에서부터 가을색을 칠하며 아래로 점점 내려온다.
지리산은 위에서부터 가을색을 칠하며 아래로 점점 내려온다. ⓒ 박주현

9월의 마지막 일요일인 24일 오전 전주에서 찻길을 달려 지리산 정령치를 향했다. 주5일제 시행이후 주말이면 동료 또는 후배 기자들과 가끔 찾는 정령치 코스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지리산 관광도로를 따라 해발 1000m를 단숨에 올랐다. 걸어서 오르면 한나절도 부족할 시간이지만 운봉읍에서 불과 30분 여 남짓 차로 달릴 수 있다. 지리산 10경의 하나인 정령치가 가을 옷을 위에서부터 가라 입기 시작한다. 기원전 84년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장군을 파견하여 지키게 했다는 정령치. 그래서 인지 지금도 사방이 시야에 쏙 들어온다.

정령치 아랫마을은 벌써 가을 수확을 마치고 겨울 준비에 돌입하느라 분주하기만 하다.
정령치 아랫마을은 벌써 가을 수확을 마치고 겨울 준비에 돌입하느라 분주하기만 하다. ⓒ 박주현

남원시 주천면 육모정과 산내면 뱀사골을 경유하는 코스도 좋지만 너른 운봉마을의 평야지대를 거쳐 국도를 따라 오르는 코스는 여러 가지 눈요기 거리를 제공해서 준다. 멀리 그리고 가까이 굽이치는 하늘과 맞닿은 능선들과 어우러진 황금빛 너른 들녘 사이에서 이름도 모르는 야생 꽃과 나무들을 만나는 일은 행복하다.

울울창창한 숲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고단한 삶의 찌꺼기들이 순식간에 달아나 버리기도 한다. 불안한 시간의 흐름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소통의 채널에 애써 호흡 맞출 필요도 없다.

노여움도 원망도 계절에 대한 앙탈도 없다

해발 1천미터 이상을 30여분 만에 차로 오르는 인간들에게 자연은 무어라 말할까
해발 1천미터 이상을 30여분 만에 차로 오르는 인간들에게 자연은 무어라 말할까 ⓒ 박주현

정령치 정상에 올라서면 바로 눈앞에는 유순하게 흘러내리는 만복대가 다가오고, 뒤로는 운봉평야가 멀리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꾸불꾸불하게 포장된 정령치 도로가 시원하게 펼쳐져 보인다. 반야봉의 큰 덩치가 금세 손으로 붙잡을 수 있을 만치 가까이 시야에 잡히는가 하면 멀리 뭉게구름 사이로 천왕봉도 바라보인다.

정령치 정상에 선 장승들 사이로 뭉게구름을 목도리처럼 뽀송뽀송 걸친 천왕봉이 마주 보인다
정령치 정상에 선 장승들 사이로 뭉게구름을 목도리처럼 뽀송뽀송 걸친 천왕봉이 마주 보인다 ⓒ 박주현

오늘은 시계가 좋아 사방의 전망이 탁 트인 게 시원하기만 하다. 날마다 머리에 빛을 이고 살았지만 이렇게 친절하고 깍듯한 햇빛은 근래 구경을 못해 봤다. 정령치 정상에 오르니 늙은 장승들이 가장 먼저 정중하게 맞이해 준다. 근처엔 시린 듯 부르르 몸을 떠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 주목들이 가지마다 경이로운 풍경을 안겨준다.

정령치 정상을 지키는 여섯 정장군 장승들
정령치 정상을 지키는 여섯 정장군 장승들 ⓒ 박주현

무언가 긴히 할말이 있을 듯싶은 여섯 장승들은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게 맞이한다. 가식 없이 허물을 벗어버리고 모든 속내를 드러내고 서 있는 모습에선 마음속의 고민을 모조리 털어 내놓고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던 친구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말없는 저 장승과 과목들은 여기서 수도자들의 영성과 인간적 고뇌도 함께 다독이며 어루만져 왔으리라.

장승들 바로 옆 빛살로 활개 뻗은 갈대의 가는 허리는 나긋나긋 춤을 추며 우리를 반긴다. 살랑거리며 노니는 춤사위가 마치 한 맺힌 몸짓인 동시에 절망 이전의 체념인 듯 미소로 나붓거린다. 노여움도 원망도 계절에 대한 앙탈도 없이.

계절의 순응이 유일한 소통방식

정령치에선 갈대가 가장 먼저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다
정령치에선 갈대가 가장 먼저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다 ⓒ 박주현

갈대처럼 세상일에 초연하며 부는 바람대로 살수만 있다면. 일순간의 머무름만으로도 덕지덕지 묻은 세상 속기를 한 줌이나마 털어 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문득 세상은 나를 향해 어떻게 열려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시계를 핍진한 세속에 두고 온 나는 어느새 시간이 머문 곳에 한창을 서 있었다. 소통채널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저 순응하면 되는 것이다. 떠나오기 전 다시 바라본 정령치 정상은 스산한 가을바람이 이리 저리 헤매며 거닐고 있었다.

정령치에서 육모정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한 선유폭포
정령치에서 육모정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한 선유폭포 ⓒ 박주현

정령치를 내려오다 선유폭포를 만났다.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는 곳이란다. 파랗게 맑은 물속은 가을햇살이 굴절하여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게 보였다. 한기를 느낄 만큼 물은 차갑다. 하 여름 불타던 이 계곡에는 어느덧 불이 꺼진 듯 무수한 나뭇잎이 떨어져 땅과 물이 닿는 곳을 덮고 있었다.

가을은 슬픈 계절만은 아니다. 산길을 걷다 보면 이따금 낙엽이 쌓인 더미에 무릎이 빠져 바스락 이는 나뭇잎을 헤집고 꼬부랑길을 오르기도 하고, 형형색색의 모습에서 탄성을 지르며 순간의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풍요로움도 맛볼 수 있다.

황금 빛 운봉평야와 코스모스, 그리고 호랑나비가 가을 색 조화를 이룬다
황금 빛 운봉평야와 코스모스, 그리고 호랑나비가 가을 색 조화를 이룬다 ⓒ 박주현

호랑나비 한 마리가 길옆 활짝 핀 코스모스와 노니는 모습이 하산하는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서로 잘 어울리는 코스모스와 황금 빛 들녘 사이로 정령치 정상이 아릿하게 보인 순간 그리움이 샘솟는다.

여름 내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산과 들을 뜨겁게 헤매던 매미는 어느덧 허물을 벗고 마을 어귀에서 계절의 순환에 순응하고 있었다. 기약도 없이 행장하나 챙기지 않고 홀가분한 몸으로 길을 떠나는 나그네처럼 이 가을을 온몸으로 앓다 길을 떠나는 여행자와도 같다.

인간소통, 정령치 시계만 같다면...

세월의 이끼와 함께 겹겹이 쌓인 갈색 이파리들도 정적에 싸여 계절의 순환을 음미하고 있었다. 자연의 계절순환은 소통이 부재하거나 소통채널 없이도 가능하다. 그저 순환의 법칙에 순응하면 그만인 것이다.

무더운 여름내내 산과 들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했던 매미가 허물만 남긴 채 소리없이 퇴장했다
무더운 여름내내 산과 들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했던 매미가 허물만 남긴 채 소리없이 퇴장했다 ⓒ 박주현

그러나 일상의 차원에서 우리는 소통부재 혹은 소통의 불통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들을 너무 자주 만난다. 지금 우리사회 보수는 폭력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반면 진보는 거꾸로 폭력을 너무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복잡해질수록 더욱 날카로워진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는 지역을 더욱 숨통 조이게 한다. 지역 내 소통채널이 절대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역언론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겠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선 있으나 마나하다.

지역신문 구독률이 한 자리수를 맴도는 지역에서 10개 이상의 지역 일간지가 무슨 소통 채널을 다하겠는가. 대부분 소통채널을 중앙에 맞추어 놓고 있기 때문에 지역 내 소통부재 현상은 날로 심각하다. 중앙의 보수와 진보, 지역간 꽉 막힌 소통이 문제다. 막힌 소통이 정령치에서 바라보이는 시계처럼 확 트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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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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