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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주 상큼하고 맛있습니다
아주 상큼하고 맛있습니다 ⓒ 김관숙
이웃이 가을 오이깍두기를 해먹고 싶으면 자기 집으로 빨리 내려오라고 인터폰을 했습니다. 제철이 지나서 요즘 오이가 비쌉니다. 배추김치 하나면 되지, 그 비싼 오이를 사서 오이깍두기까지 해먹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투로 보아 이웃들을 불러 모았을 것 같아서, 심심도 하고 해서 슬슬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웃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문이 활짝 열린 그 집 현관 안에 오이 한 포가 덜렁 세워져 있습니다. 괜히 왔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웃이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가는 쫓아 나옵니다.

"반씩 나누자구."
"공짜야?"
"이 가을에 이렇게 이쁘게 쏙 빠진 오이를 누가 공짜로 줘?"


이웃은 히히 웃더니 주방에 가서 비닐봉지를 가지고 와서 제멋대로 오이 한 포를 반씩 나눕니다. 그러더니 나눈 것 하나를 무조건 내 앞으로 떠밉니다.

"공짜야 공짜! 우리 고향 지킴이 큰 조카가 보냈어. 참 고추 주문 안 해?"
"맙소사, 그러니까 이 오이가 미끼인 거네. 근데 어쩌지, 고추 벌써 열 근이나 샀는데…. 마트에 갔다가 호고추가 하도 좋아서 샀지. 나 오이 안 먹을 거야."
"미끼가 아니구, 내가 이런저런 신세 가끔 지잖아. 그래서 주는 거라구."


이웃은 쪼르르 전화기 쪽으로 가서 수첩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수첩에 무조건 우리 집 호수와 10근이라고 쓰는 것이었습니다. 적힌 내용을 보니까 주문받은 집들이 손바닥만한 수첩 한 면을 까맣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많이도 주문을 받아냈습니다. 수단도 좋습니다.

이웃은 수첩을 덮고 나서 고추 열 근을 강제로 안긴 것을 합리화하려고 내 눈치를 보며 말했습니다.

"그 집은 열 근 가지고는 안 되잖아. 열 근 더 사야 일 년을 먹지, 안 그래?"

하기는 우리 식구가 전과 같이 김치며, 모든 음식에 제대로 고춧가루를 넣고 해먹으려면 일 년에 스무 근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추석 전에 맏물 고추 스무 근을 사서는 물행주로 닦고 다듬고 째서 말려서는 씨를 털어 가루로 빻아 두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남편도 아들도 김치를 많이 먹지 않습니다. 작년에 장만한 고춧가루도 꽤 많이 남았고, 그런데다 매운 음식을 잘 먹던 딸애는 몇 년째 해외에 나가 있습니다. 또 여행이다, 외식이다, 식빵이다 해서 집 밥을 안 먹는 날도 많아 마트에서 산 열 근만으로도 일 년이 충분합니다.

"정말 더 안 사도 된다니까. 안 사!"
"그러지 말구 맏물일 때 사두라구. 호고추라 하나도 안 매워. 그리고 누가 알아? 갑자기 식구가 늘게 될는지. 사위, 며느리 보게 될지 모르잖아."


사위와 며느리를 보게 될지 모른다는 말에 그만 나는 아무 말도 못합니다. 벌써 몇 년째나 기다려도 사위와 며느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말보다 더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더는 안 산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슬며시 딴소리를 합니다.

"고모 노릇 아주 단단히 하네."
"뭐, 그렇게나 도와주지 어쩌겠어. 그니까 팔아준다고 생각말구, 농사짓는 친 조카에게 힘 실어 준다구 생각하라구."


오이 반포를 내게 공짜로 준 것도 가만 생각해 보니까 지난 여름에 내가 그 집을 봐 준 데 대한 보답인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일주일간 여름휴가를 떠난 동안에 그 집 복도에 있는 화분들에 매일 같이 물을 주었고, 신문과 우편물들을 챙겨 놓았고, 우편물 중에서도 납기일이 다 된 고지서는 내 돈으로 납부까지 해 준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납부한 금액을 받았습니다만.

그렇더라도 오이 반 포는 너무 과분합니다. 횡재를 한 것으로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모처럼 고추가루를 평소 보다 더 넣었습니다
모처럼 고추가루를 평소 보다 더 넣었습니다 ⓒ 김관숙
어쨌든 오이깍두기를 담그게 되었습니다. 깨끗하게 씻어서 깍둑썰기를 해서 살짝 소금에 절여 두고 자투리 하나를 먹어 보았는데, 아주 상큼한 게 맛있습니다. 하긴 오이를 썰 때부터 사각 하는 소리가 침샘을 자극하며 유별났습니다. 서늘한 날씨 때문일까, 한여름에 오이 맛과 천지 차이가 납니다.

내친김에 나머지 오이들을 납작 썰기를 해서 소금에 절였다가는 돌로 눌러 놓았습니다. 도라지 한 움큼을 넣고 초고추장에 무칠 생각입니다.

납작 썰기해서 살짝 절입니다.
납작 썰기해서 살짝 절입니다. ⓒ 김관숙
삼십 분 정도 돌로 눌러 놓으면 알맞습니다
삼십 분 정도 돌로 눌러 놓으면 알맞습니다 ⓒ 김관숙
소금에 살짝 절여진 깍둑썰기 한 것들을 물에 한번 헹구어 건져서는 준비한 양념들을 넣고 긴 나무주걱으로 한참 오이깍두기를 버무리는데 남편이 다가오더니 얼른 한 개를 집어 먹습니다. 아작아작 씹는 소리가 싱그럽습니다.

"간 괜찮아? 새우젓만 넣었는데."
"야 맛있네, 가을 오이깍두기가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네."


그러는데 인터폰이 왔습니다. 남편이 받았습니다. 그러더니 날 더러 받아보라고 합니다. 나는 얼른 나무 주걱을 놓고 인터폰을 받았습니다.

"형님 나예요."
"엉, 왜?"


이웃 동에 사는 친구입니다.

"형님, 고추 좀 사세요. 올케가 부탁을 해서요. 맏물이고 형님 좋아하는 호고추예요."

역시 고추의 계절 가을입니다. 나는 또 한 번 가을이 왔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하나. 저쪽 섭섭하지 않고 나도 마음 편하게 하려면 뭐라고 거절을 해야 하나. 얼른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가루로 해 달라면 가루로 해 준대요. 고추 팔아서 아이들 컴퓨터 바꿔 줄 거래요."

아이들 컴퓨터 바꿔줄 거라는 말에 나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얼른 거절하지 못하고 있는데, 채근하는 말이 날아왔습니다.

"딱 열 근 남았는데, 열 근 다 사실래요?"
"엉? 글쎄."
"왜 너무 많으세요?"
"아냐, 그렇게 해. 가루로 말야…."


졸지에 스무 근이나 샀습니다. 며칠 전에 마트에서 사다가 둔 열 근까지 해서 모두 삼십 근입니다. 내가 어이없어해 하면서 웃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잘했어, 뭐든 넉넉하면 좋지 뭘. 덕분에 비행기에 좀 실어 보내기도 하고 말야."

남편은 해외에 나가 있는 딸애를 생각했습니다. 나도 방금 딸애의 얼굴이 떠올랐었습니다. '고춧가루가 진즉에 떨어졌을 텐데'하고 생각하다가 다시 나무주걱을 집어 오이깍두기를 버무립니다. 그러다가 넘치게 주문한 고추의 양을 생각하고는 아낌없이 고춧가루를 두어 스푼 더 넣었습니다. 빛깔이 아주 곱다 못해 찬란합니다. 남편이 한마디 합니다.

"야아, 거 얼큰하겠는 걸. 뭐랑 궁합이 제일 잘 맞을까, 쌀밥? 보리밥? 콩밥?"
"보리밥이지 뭐."
"맞아 보리밥이야. 낼 아침엔 늘보리 많이 두고 밥하라구. 누룽지도 나오게 하구."


인정이란 별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필요한 양보다 조금 넘치게 고추를 사주면 나는 풍부해서 좋고, 고추농사 짓는 이에게는 힘을 실어 주게 되고, 또 그토록 바꾸고 싶은 컴퓨터도 바꿀 수가 있게끔 해 주게 되는 그런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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