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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성심여고 전경. 사진의 왼쪽 건물이 규승관(본관), 오른쪽이 춘화관(다목적 교실)이다.
전주 성심여고 전경. 사진의 왼쪽 건물이 규승관(본관), 오른쪽이 춘화관(다목적 교실)이다. ⓒ 오세림
전주 경기전과 태조로를 사이에 두고 전동성당 옆으로 나란히 있는 전주 성심여자중·고등학교(학교법인 해성학원)가 개교 60주년을 맞이했다.

현재 전주에는 해성 중·고와 성심여중·고 등 천주교 전주교구가 설립한 4개의 학교가 있으며, 이들 학교의 뿌리는 일제시대 억압받는 민초들의 문맹퇴치를 위해 운영하던 '해성강습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 태동을 찾아가자면 1891년 까지 시간을 되돌려가서 당시 전주 시민들이 전주본당(현재의 전동성당) 초대 주임신부인 보두네(Francis Xavier Baudounet·윤사물) 신부에게 학교(학방)의 설립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보두네 신부는 성당 인근에 학교부지 1500평을 마련하고 전답 56두락을 마련하는 등 학방의 설립을 추진하다가 1896년 성당신축 문제가 맞물리면서 잠시 뒤로 미뤘다.

이후 1926년 라크루(Marcello Lacrout·구마슬) 신부가 성당 구내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문맹퇴치와 교리교육을 위해 '해성강습소'를 열면서 뒤로 미뤄졌던 학교설립의 첫 발을 내딛게 됐다.

해성강습소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물론 일반학교의 교과목 중 일부를 가르쳤으며, 라크루 신부의 뒤를 이어 김양홍 신부가 교우 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주야 강습소인 '해성학원'을 설립했다.

김양홍 신부는 정규교육과 교사 자격증을 가진 수녀들로 하여금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기 위해 교사(校舍) 신축과 수녀원을 세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며, 1930년 신자인 이학수씨가 아들인 이춘화씨를 시켜 전답 100여마지기(약 2만평)를 학교 기본자산으로 교회에 기증했다.

이어 31년에도 이춘화·이춘의 형제는 교사신축과 수녀원을 세우기 위해 건축비 3천원을 들여 이듬해 100평 규모의 벽돌 양옥 교사와 2층의 연와제 수녀원을 완성했으며, 이춘화씨는 37년에도 학교 증축을 위해 1만원의 재산을 내놓았다.

1946년 성심여학교 설립당시 사진
1946년 성심여학교 설립당시 사진 ⓒ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
당시 교사의 평균 월급여가 60원 수준이며, 일제가 전쟁기금으로 모은 금액에 대한 기록에서 40만원이 비행기 4대 값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액수다.

이렇게 해서 38년 '해성심상소학교'가 초등교육기관으로 설립인가를 받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41년부터는 일제에 의해 억압을 받다가 마침내 45년 4월에는 폐교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전동성당 이상화 주임신부와 가윤식 보좌신부, 청년회, 샤르뜨르 성바오로 수녀회를 중심으로 '성심여학원'의 설립 노력이 다시 시작됐으며, 46년 8월 1일 드디어 '전주 성심여학원'의 설립인가가 나고 10월 3일에 학교의 문을 열게 됐다.

이후 48년 7월 29일 정규 중학교로 승격됐으나, 6·25전쟁을 겪으면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6·25전쟁 중인 51년 8월 교육법 개정으로 학제가 개편되면서, 이듬해 4월 13일 고등학교 설립인가를 얻어 4월 30일 15명의 학생이 처음으로 성심여고에 입학하게 됐다.

1955년 당시 교실 창 밖으로 활짝 웃고 있는 전주 성심여고생 모습
1955년 당시 교실 창 밖으로 활짝 웃고 있는 전주 성심여고생 모습 ⓒ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
이 당시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어서 수업료 대신 쌀 한 되씩을 받았으며, 교사들 월급은 쌀 두말이 전부였다.

힘든 시절을 버티고 그리스도를 닮은 인재 육성에 앞장 선 성심여중·고는 96년 총동창회가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옥잠회 동산의 성모상'을 화강석으로 제작했다.

그리도 다시 10년, 개교 60주년의 역사를 맞이한 전주 성심여·중고의 동문들이 23일 학교 교정에 모여 기념미사를 봉헌한다.

기념미사에 이어 새로운 교사로 거듭난 성심여고의 본관과 다목적 특별교실 건물에 대해 '규승관'과 '춘화관' 현판식이 이어지고, 오후에는 동문들의 축하공연과 재학생들의 특별공연, 동문 기수별 장기자랑 등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됐다.

"벌써 60년 세월이 흘렀다니"
최문자 전주성심여중·고 총동창회장

▲ 최문자 총동창회장
ⓒ오세림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교정도 작고 학생 수도 적었는데, 이제는 여성인재 배출의 산실로 우뚝 선 모습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뿌듯하네요."

개교 60주년을 앞두고 20일 오전 전주 성심여자중·고등학교 교정에서 미리 만난 최문자(66·여고 4회·솔로몬어린이집 원장) 총동창회장의 감회는 남다른 듯 하다.

1955년,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돼 누구나 힘들기만 하던 시절에 성심여고에 입학한 최문자 동창회장은 "어려워도 까만 교복을 입은 친구들끼리 모여 깔깔대고, 노래도 하고, 책도 읽고, 타이프도 배우고 하던 시절이 엊그제인데 벌써 개교 60년이라니…"라며 벅찬 감정에 뒷말을 쉽게 이어가지 못한다.

그동안 딸 김연희(46·여고 31회·주부)씨도 이 학교를 졸업해 모녀 동문이 된 걸보면 개교 60주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때 우리 동기들만 두 반이고, 1년 선배와 후배들은 1반씩뿐이었지만"이라며 말을 꺼낸 최 회장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밤늦도록 모여서 축제를 준비하고, 반별로 떡국도 끓이고 정말 즐거운 추억들이 많다"고 말한다.

그녀는 "돈이 없으니까, 연극 소품을 준비하면서 하얀 종이에 남색물을 들여서 만들어 입었다가 나중에 속옷까지 다 남색물이 들곤 했다"고 말하면서 이미 추억 속을 걷고 있다.

이어 최 회장은 "우리 손녀딸 같은 후배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로 커 주길 바란다"는 소망도 잊지 않았다. / 소장환

"반세기가 넘는 세월, 4만여 동문 배출한 여성인재 요람"
김낙완 성심여중·고 개교 60주년 행사준비위원장

▲ 김낙완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장
ⓒ오세림
"회갑은 사람에게는 노년을 의미하지만, 학교로서는 완숙을 말하고, 전통과 역사를 의미합니다. 60년이란 세월은 우리에게 자신이고, 힘이고, 터전입니다."

전주 성심여자중·고등학교 개교 60주년 행사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낙완 성심여고 교장은 학교 60년 세월의 의미를 이렇게 부여했다.

"그 세월동안 성심여중·고가 배출한 졸업생이 4만 여 명에 이르고 있다"는 김 교장은 "동문들이 각 분야에서, 전국 각지에서 성실한 시민으로, 유능한 인재로 각자의 몫을 다해주고 있어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여성인재 배출의 산실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김 교장은 이처럼 뜻 깊은 개교 60주년 행사를 앞두고 총동창회(회장 최문자)와 함께 성심장학재단(기금 2억원)을 설립하고, 개교 60년사를 다시 정리하면서 성심여고 본관과 다목적교실 건물에 ‘규승관’ 및 ‘춘화관’ 현판식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마련하고 있다.

아울러 김 교장은 "현대는 양성평등의 시대, 여성도 남성의 그늘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인 만큼 ‘성심학교 출신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말을 듣는 여성인재들을 키워낼 수 있도록 교직원들이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는 당부도 꺼내놓는다. / 소장환

덧붙이는 글 | 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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