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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렁주렁 매달린 조롱박들
주렁주렁 매달린 조롱박들 ⓒ 김현
가을엔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산과 들 그 어디를 가도 푸른 하늘을 맘껏 마실 수 있는 가을의 모습은 설렘을 가져다준다. 아내도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망설임이 있으면 떠날 수가 없다. 그냥 발길 닿는 데로 나서다 보면 뜻밖의 풍경을 만날 수도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운 선물을 볼 수 있다는 기분만으로도 만족이다.

들녘 곡식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농민들의 땀방울 같은 알곡들이 영글어가고 있는 모습은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그 풍요 속으로 한 발자국만 더 들어가면 농민들의 한숨과 아픔이 들리지만 몇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면 아름답게 보이는 아이러니한 현실 속을 걸어가 본다.

농부들의 땀방울로 자란 생명들
농부들의 땀방울로 자란 생명들 ⓒ 김현
노랗게 익어 가는 나락들이 ‘뭘 보셨나요? 내 몸의 알곡만 보이는가요, 아님 쭉정이도 보이는가요?’하고 묻는 것 같다. 그러나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 알곡과 쭉정인 내 아버지의 모습이고 농사를 짓고 있는 내 동생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그만 가자고 조른다. 논두렁을 따라 메뚜기와 방아깨비를 잡으려 아빠를 따라 차에 내렸던 녀석들이 목적을 달성하자 다른 데로 가자고 한 것이다.

“메뚜기 다 잡았니?”
“응, 아빠. 방아깨비도 한 마리 잡았어. 봐 방아 잘 찐다.”

아들 녀석이 방아깨비 다리를 잡자 방아깨비가 열심히 인사를 한다. 딸아이는 여치를 잡았다며 보여준다. 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처제네 식구들과 합세를 했다. 여동생 같은 처제네 하곤 자주 오고가거나 중간에 만나 놀러가기도 하는 사이다.

박 잡아라. 으랏챠차
박 잡아라. 으랏챠차 ⓒ 김현

코스모스가 양 옆으로 길다랗게 나았는 길을 걸었습니다.
코스모스가 양 옆으로 길다랗게 나았는 길을 걸었습니다. ⓒ 김현
길가의 풍경을 감상하던 아내가 갑자기 차를 멈추라고 한다.

“서방님, 잠깐만… 잠깐만 서 봐요.”
“왜, 갑자기. 뭐 볼 일 있어?”
“볼일은. 우리 코스모스 길 한 번 걷자고.”
“꽃도 별로 안 피었는데… 그냥 가지.”
“아이, 잠깐만 서 봐. 무슨 남자가 멋대가리 하나 없어.”

멋대가리 없다는 아내의 통박에 차를 길가에 세우고 코스모스 언덕으로 올라서자 뜻밖의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박이다. 조롱박과 길다란 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아이들이 박을 보더니 ‘와~!’ 함성을 지르며 달려간다. 아내가 “어머! 저 박 좀 봐” 하며 감탄을 한다.

“와, 이런 곳에 이리 아름다운 곳이 있었네. 코스모스 꽃만 피었다면 환상이겠다.”

조롱박 틈틈이 수세미마냥 통통하고 길쭉한 박들이 걸려있다.
조롱박 틈틈이 수세미마냥 통통하고 길쭉한 박들이 걸려있다. ⓒ 김현
정말이지 하우스 형태로 지은 터널에 박들이 매달려 있는 모습에 절로 감탄이 인다. 내가 지금까지 봐 온 박이란 울타리 담장 너머 하늘거리며 매달린 박과 지붕에서 둥글둥글 굴러다니는 박이 전부였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본 거고 최근에 박을 구경한 적이 없었다.

“서방님, 이건 수세미 같아. 옛날 우리 집에도 수세미 있었는데.”
“아빠, 이것도 박이야? 무슨 큰북을 치는 북채 같아. 그지?”
“정말 그러네. 한울 니 머리 한 번 대 봐라. 어떤 게 더 큰가.”
“싫어. 누나 머리 대 보라고 해. 내 머리가 무슨 박 머리야.”

아들 녀석의 ‘박 머리’란 말에 잠시 웃음이 인다. 그러더니 누나와 함께 박을 향해 솟구친다. 박이 손에 닿을 듯 말 듯하자 몇 번이고 솟구쳐 뛴다. 딸아인 박을 만졌다며 좋아한다. 그러나 끝내 대롱대롱 매달린 박을 만지지 못한 아들 녀석은 안아달라고 조른다. 아들 녀석을 번쩍 안아 올리자 이번엔 다른 아이들도 서로 안아달라고 아우성이다. 한 명씩 안아 박을 만지게 하자 다른 박이 나 있는 곳으로 아이들이 달려간다.

꽃이 피었으면 환상적인 꽃길이 되었을텐데...그래도 넘 좋았습니다.
꽃이 피었으면 환상적인 꽃길이 되었을텐데...그래도 넘 좋았습니다. ⓒ 김현
딸아인 드문드문 핀 코스모스 꽃이 예쁘다며 꽃잎 하나를 살짝 꺾어 머리에 꽂는다. 그리곤 예쁘냐며 확인을 한다. 예쁘다는 말에 활짝 웃더니 아빠의 볼에 뽀뽀를 한다. 녀석의 그런 모습을 보면 천상 여자아이다. 답례로 나도 딸아이 볼에 뽀뽀를 해줬더니 히히 웃더니 달려간다.

작은 바람을 남겨놓고 달려가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언제까지 저리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줬으면 하는 마음이 물씬 들어온다. 그런 나의 모습을 피식피식 웃으며 바라보던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에구 딸밖에 몰라요. 이봐요 서방님. 여기 마누라도 있으니 내게도 뽀뽀 한 번 해줘봐. 맨날 딸만 하지 말고. 마누라한테 잘 해야지 딸한테 잘 해봐야 소용없어요.”

푸르고 갸냘픈 잎에 둘러싸인 청초한 모습의 코스모스...
푸르고 갸냘픈 잎에 둘러싸인 청초한 모습의 코스모스... ⓒ 김현
아내의 말을 안들은 척 하고 아내의 손을 잡는다. 그런 날 보고 아내가 피식 웃는다. 아내를 따라 함께 웃으며 푸른 향이 밀려오는 코스모스 길을 걷는다. 초등학교 시절 책가방을 둘러메고 코스모스 피어 있는 신작로를 걸으며 히득거리며 놀던 때가 생각난다.

조롱박이 주렁주렁 열린 터널을 지나면 코스모스 길. 코스모스 길을 지나면 다시 조롱박의 터널. 그렇게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 코스모스 꽃이 덜 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나는 내내 허공에 매달려 하늘하늘 춤을 추는 조롱박이 눈에 아른거린다.

통통통 하늘을 나는 듯한 박들...
통통통 하늘을 나는 듯한 박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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