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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톤보리 강 야경
도톤보리 강 야경 ⓒ 박경
먹다 망하는 오사카

난바 근처에 짐을 푼 우리는 오사카의 번화가 도톤보리로 향했다. 사람들이 왁자하고 먹을거리가 풍성한 골목길에 들어서니 묻지 않아도, 여기가 도톤보리구나!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일본에서 도쿄 다음으로 큰 도시 오사카는 운하가 발달하여 일본의 베니스라고도 불린다. 바다를 끼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고 상업이 발달하여 다양한 음식 재료가 수시로 공급되는 오사카에 먹을 게 넘쳐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에도시대부터 강가를 따라 술집과 가부키 극장들이 생겨난 도톤보리는 오늘날 오사카 최대의 번화가로 자리를 잡았다.

도톤보리의 명물들이라는 게요리 간판, 쿠이다오레 인형, 쿠리코 간판을 돌아보면서 심사가 배배 꼬이기 시작한다. 뭐 얼마나 대단한 역사와 사연을 품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손님을 끌기 위해 세워 놓은 식당 앞 인형이나 간판 앞에서 감탄을 연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 1. 가니도라쿠  2. 구리코 간판. 4460여개의 네온등이 화려하게 빛난다  3. 도톤보리강  4. 쿠이다오레 인형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 1. 가니도라쿠 2. 구리코 간판. 4460여개의 네온등이 화려하게 빛난다 3. 도톤보리강 4. 쿠이다오레 인형 ⓒ 박경
눈으로 못다 푼 한, 입으로라도 풀어야 할 판. 겨우 1시간 남짓 비행거리, 기내식으로 샌드위치를 줄 거라고 미처 상상도 못하고 김해공항에서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었었다. 그렇다고 공짜로 주는 기내식을 그냥 지나칠 내가 아니다. 꾸역꾸역 먹어둔 탓에, 한낮이 다 되도록 배가 더부룩 꺼지질 않는다.

우리는 도톤보리에서 가장 맛있다는 라면, 킨류라멘으로 가볍게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배가 부르다고 해서 나중에 먹어야지, 하다 보면 꼭 후회하게 된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나중에'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돌아다니며 볼 것 많은 여행에서 그 '나중에'는 비행기를 타고 돌아올 때까지 지키지 못해 다시 한 번 더 여행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불상사(?)를 종종 겪게 된다.

그러니 배가 불러도 이름난 건 먹어봐야 하는 법. 하지만 일본라면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라멘이 결코 가벼운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돼지뼈와 닭발을 푹 고아서 우려낸 국물 속에 첨벙 담긴 면, 그 위에 얹힌 돼지고기 두어 조각. 기름이 둥둥 뜨기는 하지만 느끼하거나 거북하지는 않다.

물론 냄새가 역하고 먹기 괴로운 라멘도 있다고는 들었다. 실패하기 싫다면 인터넷을 열심히 뒤지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간 길을 따라가면 된다. 그 대신 개척하는 모험의 맛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또 가끔은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믿다가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이미 부른 배를 움켜잡고, 한여름 대낮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뜨거운 라멘을 먹어야 했다. 그것도 체면치레하느라 사람 수대로 세 그릇을 다 시켰으니.

한국 같았으면 부른 배 핑계 삼아 2인분만 시켜 맛만 보고 말 것을, 낯선 곳에서 한국 아줌마의 알뜰함을 몰라보고 행여 쪼잔한 한국인으로 무시할까봐 울며 겨자 먹기로, 아니 울며 라멘 먹기로 3인분을 시켜야 했다. 이걸 먹고 소화가 얼추 되면 오코노미야키도 먹어봐야 하고 타코야키도 먹어봐야 하고 호라이 만두도 먹고, 크레페도 먹고, 먹고, 먹고 또 먹고. '교토가 입다 망하면 오사까는 먹다 망한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용을 상징으로 하는 킨류(금룡)라멘집. 킨류라멘의 특이한 점은 김치도 준다는 점.
용을 상징으로 하는 킨류(금룡)라멘집. 킨류라멘의 특이한 점은 김치도 준다는 점. ⓒ 박경
밤에 피어나는 도톤보리

해질녘 어슬렁거리며 호텔을 빠져 나왔다. 더위 때문인지 쉽게 지친 우리는 라멘을 먹은 후 숙소에서 잠깐 쉬고 나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다시 북적대는 도톤보리 거리를 헤집고 나아가다 보니, 도톤보리 강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느덧 바람은 선선해졌고 목조다리에는 강물을 향한 채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강물을 바라보고 선 게 아니라, 너나없이 간식거리들을 목조 난간에 올려놓고 음미하며 강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아하, 오늘 저녁은 이거다!

우리 가족은 방금 지나치며 봐 둔 곳으로 달려가 빈대떡 같은 오코노미야키를 사고 바로 맞은편 타코야키 집에 줄을 섰다. 제법 줄이 길었는데, 손님을 모으고 줄을 세우고 미리 주문을 받는 삐끼(?)까지 두어 명 있었다. 우리는 줄서서 기다리는 동안 티격태격했다. 호두과자만한 타코야키를 남편은 열 개를 사자고 했고, 나는 여섯 개만 사자고 했다. 내가 인터넷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타코야키가 먹기 괴로웠다느니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느니, 그냥 재미로 한번 맛만 보라는 등의 충고가 우세했다.

삐끼 청년은 내 옆에서 몇 개 살 건지 주문을 기다리고 서 있다. "맛없데! 여섯 개만 사자!" 단호하게 내가 말했다. "맛있어요!" 우리 가족은 화르륵 놀라고 만다. 내 말에 한국말로 대꾸한 건 바로 삐끼였다. 앗, 이런 실수. 당연히 한국말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여기고 편하게 소리쳤는데, 대놓고 침 뱉은 격이니 미안하고 민망하다.

한편으로는 내 자유를 강탈당한 듯 억울한 생각마저 든다. 언젠가 파리에 갔을 때, 남 눈치 안보고 신나게 뱉어낸 말이 생각났다. 그놈의 나라는 어찌된 게 아무리 급해도 돈부터 내놓고 볼일을 보아야 했으며, 밤 9시도 안되었는데 화장실 문을 잠가 버리기도 했다. 요의를 느끼며 고통스럽게 걷다가 문득 아무도 내 말을 못 알아들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욕을 퍼붓듯 큰소리로 뱉어버린 말.

오줌 마려 죽겠어! 그 기분은 뭐랄까… 오줌을 시원하게 갈긴 기분, 바로 그거였다. 갑자기 홀가분하고 가벼워져 유쾌했었다. 그런데 도톤보리에서는 그도 안 통하게 생겼다. 한국 사람들이 버글버글하고 일본인 종업원들까지 한국말을 써대니 일본인지 서울인지 헷갈릴 정도다.

어쨌든 그 삐끼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일이 생겼으니, 타코야키가 제법 맛있었다는 사실. 물커덩한 반죽 속 쫄깃쫄깃하게 씹히는 문어 맛에 반한 딸은 두 접시를 더 사다 먹었고, 일본여행 내내 타코야키 노래를 부를 정도였으니.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 1. 타코야키 만들기. 소쿠리에 문어가 보인다  2. 가쯔오부시가 뿌려진 오코노미야키와 타코야키  3. 겨자소스에 찍어 먹는 호라이 만두. 정말 맛있다  4. 크레페 모형들. 일본은 음식점마다 음식모형이 잘 만들어져 있어서 메뉴 선택이 훨씬 수월하다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 1. 타코야키 만들기. 소쿠리에 문어가 보인다 2. 가쯔오부시가 뿌려진 오코노미야키와 타코야키 3. 겨자소스에 찍어 먹는 호라이 만두. 정말 맛있다 4. 크레페 모형들. 일본은 음식점마다 음식모형이 잘 만들어져 있어서 메뉴 선택이 훨씬 수월하다 ⓒ 박경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타코야키를 먹고 싶었지만 다리 난간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차지해, 다리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아야 했다. 타코야키 하나 먹고 강물 한번 보고, 오코노미야키 한 점 먹고 강물 한번 보고. 기분이 제법 괜찮아진다. 서서히 도톤보리 강에 저녁이 깃들 즈음, 연인도 가족도 없이 홀로 계단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이도 더러 있었다.

정처 없이 약속도 없이 그냥 그렇게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을 거울처럼 마주해야 할 시간, 시곗바늘이 아무도 모르게 숫자를 건너 뛰고, 꽃들이 아무도 모르게 꽃잎을 벌리는 순간. 도톤보리의 밤은 그렇게 다가왔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 있었고 어느새 네온사인이 찬란하게 켜져 있었다. 도톤보리의 밤은 나도 모르는 사이 휘황하고 화려하게 피어나 강물을 따라 어룽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도톤보리 강. 저녁 무렵이 되면  사람들은 목조 난간에 나란히 서서 간식을 먹는다
도톤보리 강. 저녁 무렵이 되면 사람들은 목조 난간에 나란히 서서 간식을 먹는다 ⓒ 박경

도톤보리의 야경
도톤보리의 야경 ⓒ 박경

도톤보리의 야경
도톤보리의 야경 ⓒ 박경

덧붙이는 글 | 2006년 8월 12일부터 20일까지 8박 9일 동안 일본 간사이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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