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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하얗게 제 몸 말리는 타클라마칸.
소금 하얗게 제 몸 말리는 타클라마칸. ⓒ 최성수

사막에서 쓸고 온 먼지가 에어 필터에서 한 없이 솟아나온다.
사막에서 쓸고 온 먼지가 에어 필터에서 한 없이 솟아나온다. ⓒ 최진형
타림하 가는 길은 쿠처의 남쪽 방향이다. 아침, 어제 사막의 모래먼지 속을 헤매던 버스는 타림하를 가기 전에 간단한 정비 공장에 들른다. 정비 공장이라곤 하지만 길가에 허름한 집 한 채와 간단한 정비 기구가 있을 뿐이다.

비포장의 사막 길을 달렸기 때문에 에어 필터에 먼지가 많이 끼어 에어 컴프레서로 먼지를 털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필터를 꺼내더니 곧 먼지를 털어 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나오는 먼지가 장난이 아니다. 마치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 같고, 회오리바람이 이는 것도 같다.

저 먼지가 타클라마칸의 모래들이라는 생각을 하니 비로소 사막을 헤매고 다녔다는 느낌이 든다. 사막은 결 고운 모래만 있는 것이 아님을, 저렇게 자욱하게 흩어지는 먼지도 있고, 부서질 듯 삭막하게 던져져 있는 돌산도 있음을 새삼 상기해 낸다.

소금 개울이 몸 뒤채는 타림하 가는 길

먼지를 다 털어 낸 버스는 구처의 남쪽을 향해 달려간다. 아직 도시를 다 벗어나지 않은 때문인지 목화를 심은 밭도 나타나고, 옥수수가 제법 키 높이로 자란 곳도 있다. 길가로는 홍류가 가로수 대신인 듯 심어져 있다.

그런 나무들 아래로는 군데군데 물이 흐른다. 저 물은 텐산산맥(天山山脈)의 만년설이 녹아 땅 밑으로 흐르다 솟아난 것이다. 물이 없다면 사막은 존재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이다.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는 것은 해발 3천m 이상의 산이 있기 때문이고, 그 산 위에 늘 흰 이마를 드리운 만년설이 있기 때문이다.

만년설은 해발 3천m 이상의 높은 산이 있어야 존재한다. 그 만년설이 녹아 사막의 모래 땅 속을 숨어 흐르다 솟아나는 곳에 오아시스가 형성된다. 모래 사막 속을 흐르는 이 물을 복류수(伏流水)라고 한다. 제 몸을 감춘 복류수가 땅 속의 어둠을 박차고 솟아난 샘터가 오아시스니, 오아시스는 우리로 치면 샘터쯤 되는 셈일까?

당나귀 마차가 시간 속에서 걸어나온 것 같은 사막 가는 길
당나귀 마차가 시간 속에서 걸어나온 것 같은 사막 가는 길 ⓒ 최성수
홍류와 옥수수 밭 사이로 금방이라도 숨어버릴 듯 조그맣게 흐르는 물줄기를 보며 사막의 삶과 생명에 대해 생각한다. 드문드문 차들이 지나치는 아스팔트길로 당나귀 마차가 느릿느릿 지나간다. 마차를 모는 위그르 사람들이 모두 사막의 모래처럼 아득해 보인다. 사막에서는 삶이 영위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생존되는 것임을, 그리하여 치열하다 못해 마침내는 사막의 일부처럼 막막해 지는 것임을, 저 위그르 사람들은 몸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한동안 펼쳐지던 푸른 풍경이 어느새 사라지고, 눈앞으로 낙타풀 촘촘히 늘어선 사막이 나타난다. 점점 타클라마칸 안쪽으로 들어선다는 실감이 든다. 사막 한 가운데 제법 깨끗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유전이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타클라마칸 사막, 그러고 보니 이 길 사막 공로도 유전을 위한 길이다. 사람의 이동이나 생존보다는 자본의 가치를 위해 만들어진 길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 편이 씁쓸해 진다.

나의 그런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버스는 그저 사막 한 가운데를 하염없이 달려간다. 낙타풀 벌판이 사라지면 그저 흙 벌판이고, 흙 벌판이 끝나면 다시 낙타풀 벌판이다. 가시가 촘촘히 돋은 낙타풀은 사막을 이동하는 낙타의 먹이라고 한다. 군데군데 소금이 허옇게 말라있는 벌판에 끈질기게 돋아있는 낙타풀의 생명력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소금밭에서 자라는 낙타풀이니 맛도 짤 것이다. 낙타는 식량인 낙타풀을 먹으면서 풀과 소금을 동시에 섭취한단다. 가시에 혀를 찔려가면서도 낙타풀을 먹고 생존해야 하는 낙타의 운명이 서글프다. 아니 어쩌면 우리 인간도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처럼 삶의 사막 길을 걸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게 낙타풀은 월급인가? 나는 그런 엉뚱한 생각에 빠져든다. 버스는 쨍쨍한 햇살 가득한 사막 길을 몽상 속의 길처럼 달려간다.

사막의 용사, 호양수(胡楊樹)

타림 사막 공로. 인간의 길이기보다는 자본의 길(석유 수송을 위한 길)이다. 먼지 자욱한 길을 긴 트럭이 달린다.
타림 사막 공로. 인간의 길이기보다는 자본의 길(석유 수송을 위한 길)이다. 먼지 자욱한 길을 긴 트럭이 달린다. ⓒ 최성수
차가 달리던 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든다. 타림 사막 공로(塔里木沙漠公路)라는 표지판이 커다랗게 서 있다. 그 사막 길을 짐 가득 실은 트럭이 지나고, 길옆에는 차를 세워둔 채 잠이 든 사람이 편안해 보인다. 사막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지만 습도가 없어 그늘에 들어서면 시원하다. 차의 그늘조차 편안한 잠 터가 되는 타클라마칸.

잠시 달리던 버스가 길가에 멎는다. 주변으로 아름드리나무들이 푸른 잎을 햇볕에 말리고 있다. 호양수다. 사막의 용사라고 불리는 호양수는 천 년을 넘게 사는 나무다. 호양수가 숲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타림하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타림하가 가깝다고 해도 아직 물길조차 보이지 않는 메마른 사막에 저렇게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니!

나무들 중에는 수령이 무려 1600년이 된 것도 있다. 오래 된 것 치고 굵지는 않지만, 그러나 척박한 사막의 모래 먼지 속에서 나무가 자랄 수 있다는 것만도 신기한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나무의 생존 본능이다.

1600년 묵었다는 호양수. 그 나무는 사막의 세월을 머금고 자란다.
1600년 묵었다는 호양수. 그 나무는 사막의 세월을 머금고 자란다. ⓒ 최성수

같은 나무에 아래는 버들잎, 위는 포풀라. 사막의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는 호양수의 처절한 몸부림이 눈물겹다.
같은 나무에 아래는 버들잎, 위는 포풀라. 사막의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는 호양수의 처절한 몸부림이 눈물겹다. ⓒ 최성수
돋아난 지 10년 안쪽의 호양수 잎은 버드나무와 같다고 한다. 10년이 지난 나무의 잎은 포플러를 닮았고, 백 년 이후부터는 포플러보다 훨씬 큰 잎 모양을 지닌단다. 가까이 가 살펴보니 정말 한 나무에 아래 가지는 버드나무 잎이고, 위는 포플러다. 극악한 사막의 환경에 적응하는 식물의 의지가 햇수에 따른 잎 모양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리라.

타림하는 오아시스를 만들며 흐르고

호양수 숲을 지나 한참을 더 달리니 길가로 가게들이 이어져 있는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을 벗어나자 이내 거대한 강이 나타난다. 타림하(塔里木河)다. 꼬박 세 시간을 달려와 만나는 강물이다.

타림하는 제 몸 주위로 제법 풍성한 숲을 거느리고, 아득하게 사막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차에서 내려 타림하 대교를 걸어본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강물의 물살은 홍수라도 진 것처럼 거세다. 물빛도 온통 모래 빛이다. 천지 사방이 온통 모래와 황무지인 사막 한 가운데에 이렇게 거대한 강이 흐르다니, 절로 감탄이 인다.

타림하의 풍경. 물에 비친 나무는 물이 걸어온 길을 알고 있을까? 가을이면 강가의 저 잎 노랗게 물들어 새로운 사막 풍경을 만들어 낸단다.
타림하의 풍경. 물에 비친 나무는 물이 걸어온 길을 알고 있을까? 가을이면 강가의 저 잎 노랗게 물들어 새로운 사막 풍경을 만들어 낸단다. ⓒ 최성수
이 타림하가 없다면 아마도 오아시스 마을은 아예 없거나 극히 일부만 남아 있을 것이다. 총 길이 2179Km의 내륙하인 타림하는 천산산맥에서 시작되어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 흐른다. 만년설이 녹아 저렇게 큰 강물을 이루고, 군데군데 오아시스 마을들에 제 물줄기를 나누어주며 흐르는 타림하. 그렇게 흐르던 강물은 마침내 옛 누란 왕국 근처인 노프노르 호수에 이르러 제 몸을 감추고 만다.

우리네 강줄기들이 대개 이 골짜기 저 골짜기의 물들이 합수하여 제 몸을 넓히고, 끝내는 바다에 이르러 더 큰 몸을 만드는 것과는 달리, 타림하는 어느 정도 제 몸을 불린 뒤에는 사막의 곳곳에 물을 대어주다 사라지고 만다. 누란 왕국이 이 타림의 물줄기로 이루어진 이동하는 호수 노프노르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타림하는 실크로드의 존재 근거였으리라.

타림하, 제 물을 사막에 나누어주며 오아시스를 길러낸다.
타림하, 제 물을 사막에 나누어주며 오아시스를 길러낸다. ⓒ 최성수
내려다보는 강물은 도도하다. 속이 전혀 보이지 않은 사막 빛깔의 물이 마치 꿈틀거리는 용처럼 흘러간다. 강가로는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백양나무, 호양나무, 버드나무 같은 것들이다. 가을이면 강물과 노랗게 물든 숲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는 타림하. 그러나 여름날의 타림하는 찌는 듯한 더위와 쨍쨍한 햇살로 어찔어찔하다.

독수리 몇 마리가 쨍쨍한 하늘을 가로지르며 난다. 나는 그저 아무 생각도 없이 사막 아득하게 흘러가는 타림하를 바라볼 뿐이다. 강물은 제 몸을 뒤흔들며 어제처럼 흘러간다. 아니 수천 년 전을 그대로 흐르는 것 같다. 나는 시간 여행자가 되어 내가 태어나기도 전, 그 전의 어느 날로 돌아간 사람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진 채로 멍하니 강물을 바라본다.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을 지나와 저렇게 넘칠 듯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이 불가사의한 순간은 꿈일까, 현실일까?

사막에는 회오리바람이 분다

타림하를 지나 또 두어 시간을 달린다. 그래봤자 타클라마칸의 초입일 테지만 달려도달려도 끝이 없는 사막은 눈부신 햇살과 막막한 황무지다. 같은 풍경에 같은 햇살은 여행자를 몽환적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달려온 곳을 다시 달려가는 것 같은 아득함에 빠질 때쯤 차가 멎는다.

결이 고운 모래가 언덕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사막 전체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전문 여행가가 아닌 나 같은 이는 그저 이렇게 사막의 한 귀퉁이에서 전부를 상상하는 수밖에 없다.

길에서 벗어나 모래 언덕을 걸어 올라가니, 언덕 너머로는 작은 모래 언덕이 끝 모르게 펼쳐져 있다. 그저 아득할 뿐이다. 낙타풀만 어쩌다 심심풀이처럼 펼쳐져 있는 저 길을 걸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막을 건넜을까?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타클라마칸(塔克里瑪干) 사막. 죽음의 땅이라는 이 사막을 건너 인도로 갔던 동진(東晋)의 스님 법현(法顯)은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없다. 땅을 달리는 짐승 하나도 없다. 오직 앞서 간 사람의 해골 뼈로 이정표를 삼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은 사하라 다음으로 큰 사막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부는 회오리바람. 58%가 저런 바람에 쓸려 옮겨가는 이동 사막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부는 회오리바람. 58%가 저런 바람에 쓸려 옮겨가는 이동 사막이다. ⓒ 최성수
위로는 천산산맥, 아래로는 쿤룬산맥이 이어진 사이에 자리 잡은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다. 이 사막 주변으로 서역의 작은 나라 누란이 있었고, 선선이 있었고, 소륵, 구자, 고창, 차사국 등 숱한 오아시스 국가들이 나타났다 스러지곤 했다. 그 나라의 흥망은 어쩌면 사막의 모래 먼지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홀연히 나타났다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사막의 나라들!

나는 사막 끝을 바라보며 그런 나라들을 떠올린다. 내 생각의 덧없음을 눈치라도 챈 듯, 건너편 모래밭에서 회오리바람이 솟아오른다. 회오리바람에 모래벌판의 한 부분이 지워진다. 지워진 그 곳에 오아시스 국가들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혹은 회오리바람의 끝에 실려 이곳을 걸었던 법현이나 삼장, 혜초 같은 스님들이 마치 아득한 천상의 어느 땅에서 말을 타고 내려올 것만 같다.

58%가 이동 사막이라는 타클라마칸은 바람이 거세다. 거센 바람 속으로 인공 조림해 놓은 키 작은 나무들이 마구 흔들린다. 그래도 햇살은 쨍쨍하다. 아래로 손을 내리고 있으면 마치 화로에 손을 대고 있는 것 같다. 조림한 나무를 살리기 위해 저수장(貯水場-水井이라고 한다)을 만들고, 호스를 연결해 물을 대주고 있지만 그런 눈물겨운 인간의 노력조차 덧없어 보이는 것은 사막이 워낙 건조하고 메마름을 알기 때문이다.

사막을 보고 돌아오는 길은 허망하다. 내려서 걸어본 사막도 현실보다는 꿈같고, 그 뜨거운 열기조차 아득한 옛 일 같다. 사막의 일부처럼 허름한 벽돌집과 그 앞에 모여 찌는 한 여름의 오후를 흘려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어느 옛 오아시스 국가의 사람들같이 느껴지는 타클라마칸.

다시 쿠처 시내로 돌아온 밤, 저녁 겸 위그르 민속 공연을 보러 쿠처 왕부(王府)로 간다. 쿠처 왕부는 지금도 형식적인 쿠처 왕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역시 사막의 아득한 시간 속에 먼지처럼 사라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나는 수천 년 전의 차사국이나 구자국으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이름뿐인 쿠처 왕부에서 전통 춤 공연을 보는 내내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여행이 사막을 떠도는 것이고, 사막에서는 한 곳에 붙박이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삶이 마치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모래먼지처럼 시간 속에서 흩어져 버리는 것이라는 허망한 믿음 때문이었다.

사막에는 모래와 낙타풀만 듬성듬성하다. 내 마음에도 모래 버성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사막에는 모래와 낙타풀만 듬성듬성하다. 내 마음에도 모래 버성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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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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