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투명인간 최장수>
ⓒ KBS
<투명인간 최장수>라는 드라마가 종영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최장수는 죽음을 맞았고,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내내 사람들은 '감동적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실감난다' 등의 평을 홈페이지에 남기는 등 많은 사랑을 보냈다.

하지만 난 이 드라마를 한 회라도 전부 본 적이 없다. 잠깐씩 보다가 만 것이 전부다. 이유는 내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8살 때 뇌종양으로 돌아가셨다. 최장수가 죽음을 향해가는 모습이 내 아버지와 너무 닮았고,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이야기가 어머니와 나와 동생이 겪었던 모습과 너무 같았다. 사람들은 감동이라며 눈물을 흘렸겠지만, 우리 가족은 남의 일이 아니라 전율했다.

바로 내 아버지와 가족들의 이야기

최장수와 같이 나의 아버지도 불치병이었다. 그 불치병도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내가 7살 되던 해, 유치원에 다녀오니 어머니가 같이 병원에 가자고 하셨다. 그 때 따라간 곳이 아버지가 처음 입원했던 병원. 그 병원에서는 아버지의 병을 찾아내지 못해 더 큰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대학병원으로 옮겨서야 아버지는 '뇌종양'이라는 자신의 병명을 처음 들었다. 이어지는 3번의 수술. 3번째 수술이 끝나고 아버지는 반 식물인간이 되어 있었다. 멀쩡한 모습에서 그렇게 되기까지 1년이 걸렸다.

오랜 병원생활에 어머니는 지쳐 있었고, 당시 4살이던 동생은 시골 큰아버지 댁에서 자란 탓에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외가쪽 할아버지 댁에서 눈치밥을 얻어먹으며 겨우겨우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1년만에 온 가족은 다시 모였다.

하루는 내가 학교에서 받아쓰기를 60점을 맞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놈이 도저히 안되겠다"며 직접 회초리를 드셨다.

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회초리를 튕겨내며 나는 웃었던 것 같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회초리를 뺏어 무섭게 나를 내려치셨다. 나보다 아버지가 먼저 눈물흘리셨다. 잠시 뒤, 쇼파에 앉아계시던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상진아, 아빠 배 한번만 주먹으로 쳐봐라."
"아빠 배에 호스 꼽아서 안돼."
"아빠 괜찮아. 설마 네 주먹에 아프겠니?"

나는 아버지의 배에 살짝 주먹을 댔다. 그러자 아버지는 크게 호통을 치셨다.

"이 녀석 이렇게 약해서 어디다 써먹겠어. 그렇게 힘도 없어?"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지르자 아버지는 '윽' 소리와 함께 잠시 쓰러지셨다. 그리고는 "이 정도는 돼야 앞으로 맞지 않으면서 살아가지"라며 살짝 웃어보이셨다.

아마도 아들의 앞날이 걱정돼 그러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드라마에서는 물론 다르게 표현했을 테지만 죽음을 향해 걷는 장수의 마음도 그러지 않았을까?

철없는 아들, 학교간다고 임종도 못 지켜

죄송스럽게도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이 때문에 드라마 최종회에서 장수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또 아버지의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아버지가 떠나시던 날, 나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새벽 3시쯤 어머니가 흔들어 깨웠다.

"응 엄마 새벽인데…."
"상진아, 아버지 가신다. 인사드려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주무시던 그대로 119 구급차에 오르셨다. 물론 내 앞에서 당신이 떠난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코까지 골며 아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너는 내일 학교에 가야 한다'며 동생과 함께 구급차를 타고 떠났고, 나는 결국 다음날 수업을 마치고야 아버지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인 충남 예산 할머니댁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병풍에 절부터 올리라고 하셨다.

"엄마, 아빠 어딨어?"
"여기 병풍 뒤에 계셔."
"병풍 뒤에 없는데? 아빠 어딨어?"
"병풍 뒤에 계셔. 절부터 올려."

철없던 나는 그렇듯 허무하게 아버지를 보냈다. 아무 인사도 없이….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소통의 끈을 남겨놓았다. 장수가 휴대폰을 남긴 것처럼, 아버지는 지하철을 남겨놓으셨다.

아버지는 지하철 설계사였다. 1호선과 4호선은 아버지의 설계가 포함되어 있는 전동차로 운행한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손이 닿은 전동차를 손쉽게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어릴 적부터 나는 유독 전철을 타기 좋아했고, 전철 안에서는 문 옆에 기대 창 밖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은 아버지에게 몇 마디를 던지다 나도 모르게 울어버린 적도 있었다.

최장수 가족에게 말하고 싶다

▲ <투명인간 최장수>
ⓒ KBS
지금도 나는 독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릴 적에는 '아비 없는 자식'이란 소리가 듣기 싫어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독불장군'형 간부로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무서울 것 없는 기자'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가 못다 핀 인생 내가 그 몫까지 두배로 살겠다는 생각을 가지며….

최장수의 이야기가 현실이라면 나는 아마도 그의 가족들에게 우리가 살아왔던 이야기들을 해주고 싶다.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았던 우리 가족의 삶을 말이다.

그의 부인에게는 어머니가 '먹고살기 힘들어질 것'이라며 우리에게 일주일간 라면만 주고 공부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는 내가 겪었던 '아비 없는 자식'의 수모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교 간부가 되고, 죽자사자 공부한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부디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나중에 아버지를 만났을 때 떳떳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인기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는 끝이 났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 최장수는 당분간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가슴 시리도록 그립다.

덧붙이는 글 | 최상진 기자는 <오마이뉴스> 인턴기자 출신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