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세영 <원행>
오세영 <원행> ⓒ 예담
우리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일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갓과 한복을 입었고, 임금과 백성이 있었던 나라. 500년이라는 긴 역사 동안 존속해 오면서 많은 왕들을 배출한 나라. 충과 효가 강조되었던 강한 유교의 나라. 그리고 비참하고 쓸쓸하게 최후를 맞아야 했던 나라. 왕에게서 전권이 나오는 전제군주의 나라.

요즘 들어 조선사의 이면을 파헤치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고,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국왕의 실권은 굉장히 약했었다는 새로운 사실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임란과 호란이후 조선은 망하고 새로운 왕조 혹은 새로운 사회체제가 들어섰어야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논쟁 가운데 선명하게 드러나는 명확한 사실 한가지는 조선국왕의 왕권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강력한 신권에 바탕을 둔 나라였다는 것이다.

정조는 왕권약화의 정점에 서 있던 군주였다. 자존감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켜보려 애썼던 조선의 마지막 군주이기도 했다. 왕권약화와 파당정치가 맞물려 만들어낸 조선왕조 최대의 비극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을 부른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고, 이를 타파하고 조선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왕권강화를 꿈꾸었다. 그리고 그 작업의 일환으로 ‘화성천도’를 시작한다.

정조의 '능행차'가 이루어지던 8일 동안의 이야기

<원행>(오세영·예담)은 화성천도의 바로 전 단계였던 ‘능행차’가 이루어지던 8일 동안의 이야기이다. 화성 신도시 건설이 윤곽을 잡고 나자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환갑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갑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을묘년 화성행차를 단행한다.

을묘원행 일정에 포함되어 있는 군사훈련 시범행사는 기존의 군사‘오군영’이 국왕의 친히 꾸린 새로운 군사‘장용영’에 주도권을 내준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천도가 이루어질 경우 한양에서 갖고 있었던 기득권을 송두리째 잃게 되는 벽파로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고 싶은 행사였던 것이다.

이야기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정조를 없애기 위해 암살을 도모하는 벽파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옥포선생, 그리고 개혁군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약용의 삼파전으로 펼쳐진다. 시선도 셋이다. 세 개의 진영이 치밀하게 짠 계획을 전개해나가는 과정을 각각의 입장에서 번갈아 가면서 보여준다. 이야기가 무르익고 이중의 암살음모가 진행되는 가운데 정조가 원행에 오르는 장면에 이르면 독자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게 된다.

"…을묘년 윤2월 신묘일 묘시에 마침내 원행이 시작되었다. 수행인원 1800여 명에 호종군사가 4,500여 명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행차였다. 취주대가 징을 치고 뿔피리를 불며 선두에서 행차를 이끌었고. 유린기와 의봉기를 비롯해서 각야의 깃발들이 힘차게 펄럭이며 뒤를 이었다…"

작가는 시대에 관해 자세하고 길게 설명하기보다는 짧은 호흡으로 순간 순간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방식을 택한다. 천도와 군제개혁이라는 커다란 변화를 맞아 기득권의 득실을 놓고 다툼을 하게 되는 사람들의 심리흐름, 대처방식, 그리고 그 와중에 피어나는 인간들간의 우정과 사랑. 이 모든 군상들이 단 며칠만의 이야기 속에서 모락모락 맛깔스럽게 흘러나온다.

보수와 개혁을 바라보는 저자의 냉정한 시선

보수와 개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냉정하다. 정조의 목숨을 지키는 정약용의 이야기. 줄거리를 보았을 때 대뜸 이덕일을 떠올렸었다. 노론과 벽파의 독선에 관한 신랄한 비판으로 조선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었던 역사작가.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서 오세영이 그려내는 정조시대는 이덕일의 그것과는 또 틀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성천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다가도, 벽파가 국왕시해음모를 꾸미는 장면에 이르면 정조를 없애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에도 십분 공감하게 되는 것. 결국 역사에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은 없었다는 것이 작가의 입장이다.

작가의 서술방식은 간결하고 냉정하다. 시대에 대한 작가의 철학이나 직접적인 부언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장면 장면, 숨막히는 순간 순간으로 보여줄 뿐이다. 조선의 부흥을 꿈꾸었던 사실상의 마지막 군주, 친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내는 신음소리를 직접 들어야 했던 통한의 군주 정조의 왕좌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는지.

오랜 세월동안 당연한 듯 기득권을 누려왔던 노론벽파에게 정조라는 군주는 얼마나 불편한 존재였는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체제 아래에서 살아야 했던 조선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한 것이었는지. 정조가 꿈꾸었던 개혁이 어떻게 꺾여져 갔는지. 200년 전 그때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지금과 판에 박은 듯 닮아 있을 수 있는지….

원행

오세영 지음, 예담(2006)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