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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기대치가 높아지면서 ‘돈을 빌리는’남성들이 증가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기대치가 높아지면서 ‘돈을 빌리는’남성들이 증가하고 있다. ⓒ 우먼타임스
[이재은 기자] 여자친구에게 돈을 빌리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경제력을 가진 여성들이 늘어나고,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연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여성들이 증가하면서 당당하게(?) 금전 거래를 요구하는 남성들의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여성의 경제력, 사회적 지위 향상과 관계없이 두 사람 관계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착한 여자’를 강요하고 있는 것도 ‘돈 빌리는 남자’들의 증가를 가져오는 요인으로 손꼽힌다. 사랑에 울고, 착한 여자를 요구하는 남자에 울고, 돈에 우는 여자들. 그 속사정을 들여다본다.

연인 사이에서 채무자와 채권자 관계로

“지금 급하게 카드 대금 막을 게 있어서 그래. 2백만 원만 인터넷뱅킹으로 보내줘.”

장모(30·잡지사 기자)씨는 어느 날 1년째 교제 중이던 남자친구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처음엔 가까운 사이일수록 돈 거래를 하면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딱 잘라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남자친구인 김모(29·사업)씨는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으면서 이럴 수 있느냐”며 “이제 보니 너 아주 독한 여자였구나”라고 비난했다.

장씨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연애 기간 동안 가족처럼 생각하고 만나 왔는데 돈 때문에 등을 돌리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때 문득 2년 전, 자신이 오피스텔을 얻어 독립할 당시 앞장서서 집을 알아봐 주고, 이삿짐까지 날라준 남자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렇게까지 내게 도움을 준 사람인데….’ 장씨는 자신이 필요할 때는 남자친구에게 의지하고 기대면서 정작 남자친구가 어려울 때 모른 척하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자책이 들었다.

더욱이 교제하는 동안 남자친구와 동등하게 데이트 비용을 지출하며 평등한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남자친구의 요구를 모른 척하는 것이 그동안 자신이 취해온 행동과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장씨는 결국 다음 날 은행을 찾았고, 2백 만원을 남자친구에게 빌려줬다. 하지만 이 날 이후에도 그들의 금전 거래는 계속됐다.

김씨는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장씨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그 때마다 그는 통장에서 돈을 인출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장씨는 남자친구에게 빌려준 돈이 1천 만원에 육박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안해졌다. 차용증을 받지 않았고, 증인도 없었다. 무엇보다 돈을 갚아달라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연인에서 채무자와 채권자 관계로 바뀌어 있었다.

장씨는 금전 거래를 시작한 후 남자친구에게 신뢰를 잃기 시작했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다. 빌려준 돈 1천 만원을 어렵사리 돌려 받긴 했지만 그 과정은 전쟁과도 같았다고 고백한다.

돈을 빌려달라는 남자친구 때문에 고민하는 여성들

직장생활 3년 차인 조희진(28·외국계 회사 대리)씨는 남자친구에게 8백 만원을 빌려주었다가 돌려 받지 못해 법적 소송 중에 있다. 동갑내기 대학원생이었던 남자친구는 처음 조씨에게 등록금 낼 돈이 없다며 3백 만원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고,

조씨는 ‘힘들 때 모른 척하면 남이지’라는 생각에 선뜻 적금을 해약해서 돈을 마련해줬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면서 3백 만원 남짓한 월급을 타는 그는 한 달 월급쯤은 남자친구의 등록금을 위해 투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남자친구는 “내 친구 여자친구는 이번에 자동차 타이어를 다 바꿔줬더라. 용돈도 준다더라”라고 하면서 경제력 있는 다른 여자들과 조씨를 비교하곤 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절대 돈 못 빌려줘”라고 말하기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조씨에게 남은 것은 상처 입은 자존심과 후회뿐이다.

소송을 준비하면서 조씨는 남자친구의 상습적인 언어폭력에 시달렸다. “XXX, 어디 얼마나 잘 먹고 잘사는지 보자”, “너희 부모한테 우리 관계를 다 폭로하겠다”, “너 결혼할 때 두고 보자” 같은 협박도 감당해야 했다.

조씨는 “그 때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가 원하는 ‘착한 여자’가 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유명 포털사이트 게시판에서는 돈을 빌려 달라는 남자친구 때문에 고민하는 여자들의 하소연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연령, 학력,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하나같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아이디 ‘fink0823’을 쓰는 네티즌은 “나는 21살, 남자친구는 28살인데 남자친구가 어느 날 ‘정말 너에게 이런 부탁 안 하려고 했는데 1백만 원만 빌려 달라’는 메일을 보냈다”며 “메일을 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아찔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런 부탁을 받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속상하지만 분명한 건 어쨌든 난 그를 너무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성학자들은 경제력이 향상된 여성들이 증가됨에 따라 여성의 애정을 도구화해 이용하려는 남자들의 모습도 두드러진다며 금전 거래의 이면에 숨어 있는 남성들의 욕망을 정확히 집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나임윤경 연세대대학원 문화학협동과정 교수는 “남성이 여성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는 이미 여성의 애정을 확신하고 이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라며 “‘도구화된 사랑’까지 애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으로 받아들이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나 교수는 “남자친구에게 금전 거래를 요구받았을 때 ‘NO’라고 말하는 것은 착하지 않다거나 관계 지향성이 부족한 행위가 아니라 현재 연인 관계의 부적절함을 언어화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대는 변화하고 사회가 여성에게 바라는 기대치는 높아지고 있지만 연인 관계에서 요구되는 여성상은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19세기 남성’과 ‘21세기 여성’이 공존하는 우리사회의 실상이다.

남자친구와 금전거래 미리 대처하세요

애인과 금전 거래를 할 수밖에 없을 때에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는 것이 좋다. 연인 사이(사실혼 제외)의 금전 거래도 거래 양태로 보면 일반 금전 거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법률 전문가들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돈이 오고 갔다는 객관적 증거자료를 확보해 두라고 조언한다. 어차피 해야 하는 금전 거래라면, 유비무환의 자세를 취하라는 얘기다.

▲현금 거래 대신 거래내역서가 남는 은행 계좌이체를 이용한다= 돈이 오고 간 자료가 된다. 거래 은행에 가서 요청하면 금전이 오고 간 기간 동안의 총 거래 내역을 뽑아준다.

▲차용증을 쓴다= 공증을 받아두면 더욱 좋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채무자가 이메일을 통해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얼마의 금액을 빌리는지를 써 보내도록 하고 채권자는 이를 보관한다.

▲주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금전 거래를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증인 확보 차원에서 유리하다.

도움말 : 진선미 덕수 법무법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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