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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올해 처음으로 주말농장에서 농사라는 것을 접해봤습니다. 하지만 지난여른 내린 장맛비는 저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갔습니다. 애써서 가꾸던 고추가 장마가 끝나자마자 몽땅 말라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 말라죽은 고추가 썩어갑니다. 제 아픈 마음도 함께...
ⓒ 정상혁
초봄에 심어서 장마 전까지 수확의 즐거움을 한껏 누리게 해준 상추와 쑥갓은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처음 고추모종을 사다 심고 몇 주 동안은 고추와 피망이 커가는 모습에 '올 가을 김장에 전부는 아니어도 내가 농사지은 고추가루를 보탤 수 있겠구나'하고 뿌듯해 하기도 했지요.

▲ 맨 왼쪽은 피망입니다. 너무나 작은 꽃에서 열려 저렇게 컸답니다. 죽기전 고추들입니다.
ⓒ 정상혁
경험이 일천한 얼치기 농부가 쨍쨍한 여름 햇빛에 잘 자라리라 믿고 또 믿었던 고추가 어느 순간 이렇게 모두 말라죽을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주말농장 관리하시는 분을 비롯해서 몇몇 농사일을 잘 아시는 분들께 여쭤보니 토양에 있는 어떤 균이 오랜 장맛비로 텃밭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모두 죽게 만든다고 합니다.

▲ 어설프지만 장대비를 맞아가며 쓰러진 것을 세운 적도 있었지요. 죽은 채로도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를 보니 속이 탔습니다.
ⓒ 정상혁
그 분들을 이야기가 일리 있는 것이 저희 고추뿐만 아니라 제가 다니는 주말농장의 모든 고추들이 한결같이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전문적으로 고추농사를 짓는 분들도 고추농사는 이런 병충해 때문에 어렵다고 입을 모읍니다.

겨우 고추대 20개를 심은 제 슬픈 마음과 허무함이 이 정도인데 시골에서 허리도 못 펴고 고추대 세우고 줄로 묶어가며 애써 기른 고추들을 모두 잃은 분들의 심정은 어떨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죽은 고추만 바라보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올 가을 김장을 위해서 김치와 무를 심기로 했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옆에 세워둔 채로 죽은 고추대를 모두 뽑고 잡초 우거진 빈 땅도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땅을 다시 갈아엎고 퇴비 두 포대를 뿌려 다시 잘 섞어주고 검은 비닐까지 쳤습니다.

혼자서 꼬박 2시간을 일하고 구멍을 뚫어 배추는 두 뼘 간격, 무는 한 뼘 간격으로 심었습니다. 코딱지만한 다섯 평 텃밭이 어찌나 광활한지, 이날 하루 일하곤 며칠간 허리가 뻐근해서 혼났습니다.

▲ 왼쪽은 저희 텃밭, 중간은 바로 옆 텃밭, 오른쪽 텃밭은 가지런히 예쁘게 정리됐네요.
ⓒ 정상혁
내공은 이런 곳에서부터 차이가 나나 봅니다. 한 눈에 봐도 맨 오른쪽 텃밭은 가지런한 것이 예쁘게 정리가 되었는데 제 텃밭은 비뚤비뚤한 것이 '나 초보요!'하고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일주일 후, 더운 날씨에 물 한 번 제대로 못줬는데 싹이나 제대로 틔웠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몇 구멍 발아가 늦은 것을 빼놓고는 상태가 좋아 보입니다.

▲ 빼꼼히 싹을 내민 배추씨앗들입니다. 떡잎이 크고 시원시원하게 잘 생겼습니다. 이제 이 녀석들이 제 새 희망입니다.
ⓒ 정상혁
뉴스에서는 야채 값이 엄청 비싸다고 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신경 써서 몇 포기 더 심을 걸 하는 후회도 들고요. 고추가 남긴 제 마음 속의 상처를 저 배추며 무 씨앗들이 자라서 달래줄 수 있을까요? 석 달 후를 기대해 봅니다.

덧붙이는 글 | 비뚜름하게 쳐진 텃밭 비닐을 보신 주말농장 관리인 아저씨께서 "비닐 잘 친다고 농사 잘 되는 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하고 위로해 주십니다.
저도 그 말을 꼭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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