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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포진에 위치한 '교육박물관'에서 추억의 성적표를 보던 순간. 참 감회가 깊었습니다.
ⓒ 김정혜
성적표가 든 하얀 봉투. 그것을 사이에 둔 부모님과의 피말리는 한 판 숨바꼭질.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을 훌쩍 넘긴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아도 참 아찔했던 순간들이다. 그 아찔함은 지금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세월의 흐름 따라 숨바꼭질의 유형이야 다소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성적표를 꼭꼭 숨겨야 하는 그 절박함은 아마 오십보백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숨바꼭질도 자취를 감추게 될 것 같다. 이젠 내 아이의 성적을 안방에서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내 자녀 바로알기' 서비스가 바로 그것이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지난 30일 전국 초·중·고교와 특수학교의 학부모들에게 이 서비스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학부모가 자녀의 생활기록부·성적·출결석 상황·교육과정 등의 정보를 인터넷을 통하여 열람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서비스제도라고 한다.

이 뉴스를 접하는 순간, 성적표를 숨기기 위해 참 많이도 만들어 냈던 무수한 거짓말들이 폭탄터지듯 머릿 속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기발하고 때로는 허무맹랑하고 때로는 퍽이나 우둔했던 거짓말들….

그나마 거짓말이 아슬아슬한 곡예를 거쳐 진실로 둔갑해줄 때의 그 짜릿함, 그러나 이어 달려들던 죄책감. 천사와 악마의 이간질에 또 얼마나 갈등했던가. 그러나 이내 스스로를 위로하는 그 비겁함이라니.

'이 거짓말은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드리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야.'

"이러면 안되는데... 아냐, 이건 선의의 거짓말"

중학교 3학년때의 일이다. 인문계고교를 진학하느냐 실업계고교를 진학하느냐를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게 되었다.

"고마 실업계 가서 은행 같은데 취직하면 여자로선 최고인 것 같은데…"
"엄마, 은행원보단 선생님이 더 최고지."
"누가 그거 모르나. 흙파서 대학 갈끼가? 그랄 수 있으마 내 흙이사 한 짐 퍼다 주꾸마."
"……"


저녁밥도 거른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울었다. 울다 지쳐, 아니 배가 고팠다는 게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은 이상이고 허리가 접히는 허기는 현실이었다. 알록달록 상보가 덮인 소반이 다락 난간에 올려져 있었다. 그걸 올려놓으실 때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건 안중에 없었다. 허겁지겁 허기를 채우고 접힌 허리가 쭉 펴질 때, 그 때야 보였다. 다락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보석같은 별빛들이, 그리고 그 별빛 속으로 어머니의 한숨과 늘 피로에 지친 초췌한 얼굴도 함께 섞여들고 있었다.

새벽 미명이 뿌옇게 밝아올 때까지 난 내 철없음을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어머니가 짊어진 고단한 삶, 그 짐의 반이라도 나누어지는 게 자식된 도리라 깨우칠 줄 아는 나 자신이 스스로 대견했다.

그러나 그건 새벽까지의 생각이었다. 등교를 해서 대학의 꿈에 부풀어 있는 친구들을 대할 때면 난 다시 자존심의 노예가 되었다. 대학을 가야했다. 친구들에게 지기 싫다는 그 한 가지 부질없는 이유만으로 나는 대학을 가야했다. 결국 인문계를 선택했다.

"그래. 니가 자신있으니까 인문계를 선택했겠제. 엄마가 니 선택을 한번 믿어보께."

고교시절 3년. 시험과의 전쟁이었고 더불어 성적표와의 전쟁이었다. 아니 나를 믿어주는 어머니의 절대적인 신뢰, 그것과의 싸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학년 1학기까지는 성적표가 집으로 배달되어 오는 족족 어머니께 보여드렸고 당연하다는 듯이 도장도 받았다.

잘 나온 성적도 아니었다. 그저 중위권을 맴도는 정도의 성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리 당당하게 어머니 앞에 성적표를 내민 건 아직 2년이라는 긴 시간을 터무니없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적표를 보신 어머니는 그저 늘 한 마디뿐이셨다.

"최선을 다 했나? 그라마 할 수 없는 일이제."

그러나 2학기가 시작되고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중위권 성적은 요지부동이었다. 교대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될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계신 어머니. 그러나 그 성적으론 교대는커녕 교대 문턱도 못 넘어갈 게 뻔하다는 것을 분명 아실 터. 하지만 어머니는 늘 한결같은 그 한 마디로 자식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묵묵히 보여주고 계셨다.

시골가시고 입원하시고... 성적표 나올 때마다 어머니는 '바쁘다 바빠'

성적표를 움켜쥔 내 숨바꼭질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호된 꾸지람이면 차라리 속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그 두 글자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호령이 나는 더 무서웠다. 조용한 침묵 뒤로 야금야금 돌담을 쌓고있을 나에 대한 어머니의 불신이 더 두려웠다. 더 이상은 성적표를 보여 드릴 수 없었다.

학교에서 성적표를 발송하고 집으로 도착하는 날은 난 아파야 했다. 그리고 조퇴를 해야 했다. 우체부 아저씨에게서 성적표를 직접 건네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 날 받아가야 될 도장은 또 어떻게 하나. 극본대로 어머니는 시골에 가셔야 했다.

다음 번엔 주소를 틀리게 적었다. 당연히 학교로 반송이 되었고 기적적으로 성적표가 내 손에 쥐어졌다. 다음 날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셔야 했다.

돌이켜보자면, 2학년 내내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조퇴를 할만큼 골골한 아이였다. 우리 집 주소는 시도 때도 없이 바뀌었다.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시골에 가셨다. 시집간 고모가 또 시집을 갔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는 것도 모자라 아버지까지 병원에 입원하셨다.

아, 그 무수한 거짓말이라니… 그러나 어머니를 위한 거짓말이라 나를 또 위로하기 바빴던 그 비겁함이라니….

그러나 모정은 자식의 거짓말과 비겁함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3학년 첫 시험을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등교 준비로 분주한 아침. 책상 위에 얹혀진 도시락 가방 옆에 낯익은 것이 함께 놓여 있었다. 바로 손때 묻은 어머니의 도장이었다. 그리고 짤막한 쪽지 한 장.

"엄마 월급 탈 때 도장 필요한 거 알제. 사용하고 엄마 서랍에 넣어둬라."

아쉽다, 좋은 엄마가 될 기회 하나를 잃었다

그날 이후 내게 있어 성적표를 움켜쥔 숨바꼭질은 사라졌다. 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믿음을 더 이상 배신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선의의 거짓말도 또 그 거짓말에 대한 스스로의 위로에 대한 비겁함도 다 배신이었기 때문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믿음은 그만큼 위대한 것이었다. 거짓말장이 자식을 단 한 마디 호통도 없이 그토록 깊이 뉘우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나도 그런 엄마가 되고 싶었다. 비록 내 자식이 꼴찌를 하여 성적표를 숨기고 본의 아니게 나를 병원에 입원시키더라도 "최선을 다 했나? 그라마 할 수 없는 일이제" 그 한 마디를 덧붙여 도장을 내밀어 줄 수 있는 그런 엄마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젠 안방에 앉아서도 자식의 성적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하니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 한 가지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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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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