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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원추리-꽃을 보면 아이들 생각이 난다
지리산 원추리-꽃을 보면 아이들 생각이 난다 ⓒ 안준철
학교에는 다양한 아이들이 있다. 눈을 마주보고 있으면 그 환하고 천진한 미소에 풍덩 빠지고 싶은 아이가 있는가 하면, 삶의 어떤 과정에서 저리도 뒤틀어졌을까 싶은 아이도 있다. 그 두 양극 사이에 귀엽지만 버릇이 없는 아이들, 마음씀씀이는 고운데 감정의 기복이 심한 아이들, 별일도 아닌데 쉽게 마음을 다치는 아이들도 있다.

그들을 한 순간의 감동이나 뭉클한 사랑의 장면만으로 바로 잡아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잘못 감긴 그 만큼의 시간이 역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인내심이라고 할만도 하다. 사랑의 인내는 아름답지만 무겁다. 그렇다면 인내를 여유라는 말로 바꿔 쓰면 어떨까? 그렇다. 사랑의 인내가 버거우면 한 호흡의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을 만날 일이다.

개학 후 첫 교시, 수업이 시작된 지가 한참인데 은주(가명)가 교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일이 눈을 맞추며 출석을 부를 때는 조금 떠들거나 돌아다녀도 크게 나무라지 않지만 일단 수업이 시작되면 마냥 자유롭게 놓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은주 자리에 안 앉을 거야?"
"잠깐만요."

그런데 잠깐이 아니다. 아이는 교실 뒤편에 있는 거울을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보다가 제 자리로 돌아오는 듯하더니 다시 발걸음을 돌려 교실 맨 뒤에 앉은 한 아이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잠시 후 자리로 돌아와 앉은 아이를 조용히 불러냈다.

"은주 앞으로 나와 봐."
"싫어요."
"네가 잘못해서 나오라는데 싫다니?"
"선생님, 저 그런 거 정말 싫어해요."

이쯤해서 나는 말문이 막힌다. 그때가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한 호흡을 쉬었다가 다시 아이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너 언젠가 선생님한데 좋은 말로 하지 왜 화를 내냐고 따진 적 있지? 지금 좋은 말로 하고 있으니까 어서 나와."
"선생님, 그냥 수업 받을게요."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반항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 번만 봐달라는 눈치도 보인다. 수업도 해야 하니 이쯤해서 은근슬쩍 넘어가줄까?

"좋아. 그럼 그냥 자리에 앉아서 지금부터 하는 얘기를 잘 들어."

사실, 은주를 앞으로 나오라고 한 것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그것이 마침 은주와 관련된 이야기여서 앞으로 나오라고 한 것이었다. 물론 수업시간에 돌아다니지 않도록 지적을 해줄 생각도 있었지만.

"여러분, 언젠가 선생님이 교탁에 출석부를 내리친 일 기억 날 거예요. 그날도 누군가 선생님의 화를 돋게 해서 그랬던 것 같은데 방학하기 전에 받은 쪽지에다 은주가 이런 말을 썼어요. 다시는 교탁에 출석부를 내리치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요. 그것은 교사로서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냐고요.

이번 방학 때 지리산을 세 번 갔다 왔는데 산에 오를 때마다 그 쪽지가 생각났어요.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그랬을 거예요. 여러분도 인정할 거예요. 여러분이 선생님을 아무리 힘들게 하고 속상하게 해도 단 한 번도 여러분에게 욕하거나 때리거나 미워한 적 없다는 거. 그런데 딱 한 번 출석부를 교탁에 내리친 것을 가지고…"

산길 오르막에 핀 동자꽃
산길 오르막에 핀 동자꽃 ⓒ 안준철
그랬다. 백무동에서 출발하여 장터목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기다리는 그 순간에도 나는 언뜻언뜻 아이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화엄사 계곡을 끼고 노고단에 올라 구름 낀 하늘의 꽃밭에 핀 야생화를 바라보면서도 나는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내게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방학선언식을 하던 날, 나는 여자반 아이들이 방학계획서와 함께 전해준 쪽지를 읽으면서 내가 아이들에게 화를 자주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할말이 없지 않았다. 아이들의 인격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교사로서 화를 내거나 교탁에 출석부를 내리친 것은 어쩌면 고양이에게 쫓긴 생쥐의 눈물겨운 자기 방어일 수도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산에서 얻은 대답은 그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이제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할 차례였다.

지리산 운무
지리산 운무 ⓒ 안준철
"산을 내려오면서 저는 결심을 했어요. 다시는 교탁에 출석부를 내리치지 말자고요. 생각해보니 은주 말이 옳았어요. 그것은 교사다운 행동이 아니었어요. 물론 여러분의 잘못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이 반성해야할 몫이고 선생님은 선생님의 잘못을 반성을 하고 싶었어요. 앞으로는 절대로 교탁에 출석부를 내리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오늘 은주가 나오면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나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갈 뻔했는데 이번에도 선생님이 노력해서 교실 분위기를 바꿔놓았어요. 앞으로는 여러분이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교실의 주인은 바로 여러분이니까요. 알았지요?"

"예, 선생님. 잘 알았어요."

뜻밖에도 은주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눈을 돌려보니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도 평소와는 달리 퍽 단정해보였다. 그런 것을 보면 은주는 가끔 엉뚱하고 버릇없는 행동을 하긴 해도 마음이 착한 아이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한 호흡의 여유를 가지고 어렵사리 진실을 말해주고 있는 동안 제 나름대로 한 호흡의 성장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작은 변화에 대하여 예민한 영혼을 가질 의무가 있는 사람이 바로 교사가 아닐까.

아니다. 의무라니? 그것은 축복이라고 말해야 옳다. 작은 사랑과 진실에 반응할 줄 아는 아이들과 함께 사는 즐거움 말이다. 아직은 뿌리가 깊지 못하고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 탓으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몸을 앙다물고 있는 아이들도 내게 축복인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한 호흡의 여유가 필요할 뿐.

덧붙이는 글 | <사과나무>에도 글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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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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