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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 마을에서 살고 싶다>
책 <그 마을에서 살고 싶다> ⓒ 바보새
우편함에 한 권의 책이 도착했다. 이곳저곳에 서평을 쓰다 보니 뜻밖의 책을 선물 받을 때가 있어 또 어느 출판사에서 홍보 차원으로 보낸 책이려니 싶었다. 보낸 이를 살펴보니 출판사 홍보가 아닌 반가운 이름이 찍혀 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이런 저런 글쟁이들 모임에서다. 나는 이십 대 철부지 청춘, 그는 오십 대의 중견 작가이자 교직자였다. 엄청난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동글동글한 인상과 느릿한 경상도 억양이 섞인 말투, 소박하고 겸손한 삶의 자세가 금세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알게 된지 몇 년 동안 거의 매년 그가 낸 신간을 받아 보면서도 사는 게 바빠 변변한 서평 한 번 쓰지 못하고 지나간 게 미안하기도 하다. 그의 구수한 입담을 다른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글을 통해서가 가장 쉽지 않은가.

늘 느끼는 것이지만 그의 글은 참 좋다. 유명한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도 아니요, 화려한 작가 이름을 내건 책도 아니라 베스트셀러처럼 많이 팔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애독하는 이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 내가 만났던 첫인상처럼 소박한 삶의 자세와 솔직한 마음이 그대로 글에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요번에 보내 온 책 <그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도시 생활을 접고 안흥 산골에 내려가 지내는 얘기를 담은 수필집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강원도 홍수 소식을 듣고는 그가 사는 곳은 별 피해 없이 잘 지나갔나 궁금하던 차에 얼른 책장을 펴 들고 넘겨본다.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사표를 쓴 뒤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 산골로 내려간 그.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장작을 패 땔감으로 쓰고 농약 하나 안 쓰는 유기농법을 하며 시골 생활을 시작한 그의 모습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일이 젊을 때 시작하면 쉽지만 나이 들어 하려면 힘들지 않던가.

그래도 어찌어찌 시골 생활에 잘 적응하여 도시 삶을 등지고 사는 걸 보면 나이와 상관없이 그의 열정은 아직도 남아 있다는 느낌이다. 삶과 글에 대한 패기가 고스란히 책 속에 담겨 있다. 늦게 시작한 시골 생활이 만만치 않을 텐데도 그 속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고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이 멋지다.

그가 전하는 산골이야기에는 우울한 모습도 많고 즐거운 일들도 많다. 아이들이 다 떠나버려 폐교되는 학교들, 유기농으로 하면 수확량이 너무 적어 농약과 제초제를 뿌릴 수밖에 없는 농업 현실, 그렇게 피땀 흘리며 농사를 지어도 조합 빚에 허덕이는 농사꾼들. 이런 현실을 소상히 전해 주는 글은 그 일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책은 산골 이야기와 더불어 자신이 살아 온 과거 경험담들을 재미나게 전하는 것이 특징이다. 구기동 맨 꼭대기에 살면서 아파트 청약과 같은 얘기는 남의 일처럼 귓등으로 들었던 30년 세월. 웬만한 의지가 아니고서야 서울에 살면서 이렇게 재산 불리기에 무심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그의 이야기에 웃음이 절로 난다.

"그 동안 아내나 아이들로부터 지대가 낮은 곳으로 이사 가자고 숱하게 들볶였으나, 그때마다 이 집 팔아서는 전세밖에 얻지 못할 것 같아 미적거리면서 앞으로는 공기가 맑은 동네가 빛 볼 날이 올 거라고 달랬는데, 그만 안흥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더 기다리지 못하고 아파트 전세 값에도 미치지 못한 값에 팔고 떠나게 되었다. (중략)

가끔 아내가 결혼 초에 잠실이나 강남으로 이사 갔더라면 살림이 이렇게 쪼들리지는 않았을 거라고 푸념하지만, 나는 속으로 그렇게 앞뒤가 콱 막힌 사람이니까 잘 팔리지도 않는 책을 열 권이나 넘게 내지 않았겠느냐고, 그래도 몇몇 출판사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혼자 으스댄다."


이 소박하고 유머러스한 삶의 태도가 아마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배어 나왔으리라. 그래서 엄청난 세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참 '꿈꾸는 소년' 같다는 느낌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보내주는 책들을 염치없이 받아 보면서, 끊임없는 창작의 열정을 담아 펴낸 이 책이 이번에는 좀 대박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책의 내용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자신의 제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김홍걸에게 보내는 편지다. 한때는 문학 소년이었던 그가 더러운 돈과 연관되어 감옥에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고 스승으로서 한 마디 던지는 모습이 참 '역시 선생님'이라는 말을 하게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김홍걸 군은 문학과 철학, 역사를 좋아하는 과묵한 청년이었네. 자네는 새삼 기억도 하고 싶지 않을 테지만 자네의 이름이 한창 매스컴에 오르내릴 때는 무척 안타까웠네. 사형수의 아들이 그새 어쩌면 그렇게 변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의 아픈 기억들은 더 이상 들추지 않겠네. 이미 자네는 권력의 무상함을 실감했을 테고, 한 때 그런 호화 저택의 삶이 물거품이라는 것도 잘 알았으리라 믿네."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에서 재물과 권력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옛말처럼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것이 가장 큰 행복이 아니었던가. 박도 선생이 안흥 산골에서 전하는 얘기들은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말해 주는 것 같아서 내내 마음을 울린다.

그 마을에서 살고 싶다

박도 글.사진, 바보새(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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