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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익 <가족 - 사랑이야기>, 캔버스에 유채, 21㎝x28㎝, 2001년
김수익 <가족 - 사랑이야기>, 캔버스에 유채, 21㎝x28㎝, 2001년 ⓒ 이충렬
어머니와 두 아이가 화병 안에 들어있지만, 답답하다는 느낌보다는 어머니의 큰 사랑이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입덧의 괴로움도, 몸이 무거울 때의 힘듦도, 낳을 때의 아픔도, 미역국 한 그릇에 다 담아 드신 어머니. 이제는 행여나 아플까, 다칠까, 금이야 옥이야, 조심조심, 두 아이를 가슴에 품고 행복해 하는 표정과 포근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재롱을 떠는 아이들의 귀여움이 잘 어우러져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이렇게 소중하게 키워주셨고, 자식들은 어머니 덕분에 잘 자랐습니다. 그러나 '내리 사랑'이라는 말은 있어도 '오르 사랑'이라는 말은 없고, 오히려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까지 있으니, 어쩌면 이 세상의 자식들은 모두 '불효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세상이 바쁘게 돌아가고 우리의 가족제도가 점점 소가족화 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니를 찾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지만, 그래도 자식들에게 섭섭해 하는 어머니보다는 자식의 바쁜 삶을 이해해 주시는 어머니가 더 많으니 저희 자식들은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넓은지 감히 헤아릴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2. 우리 뒤엔 언제나 어머니가 계십니다

박종근 <기다림>, 실크스크린 판화, 47㎝x 36㎝, 1997년
박종근 <기다림>, 실크스크린 판화, 47㎝x 36㎝, 1997년 ⓒ 이충렬
땅거미가 내리자 산 위로 희미하게 떠오른 초승달 아래서 아이를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오래 전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을, 오랫동안 교직에 계셨던 박종근 화백이 한편의 동화처럼 그려, 우리가 도시에 살며 잊고 있던 시골이야기들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저녁상을 물리고 화롯불에 군 감자를 젓가락으로 꺼내, 아이의 입이 델까 호호 불며 껍질을 까고 한 조각 씩 떼어내 아이들 입에 차례로 넣어주시던 어머니.

부엌 선반 위에 감춰뒀던 홍시 몇 개 꺼내와, 껍질 벗기고 한 숟가락씩 떠서 아이들 입에 넣어주시고, 당신은 껍질을 빨아 잡수시던 어머니.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화들짝 등에 업고 동네 한의사 할아버지나 보건소까지 달음박질 하시던 어머니.

잠을 자던 아버지가 애새끼 우는 소리 땜에 잠을 잘 수 없으니 갖다 버리라고 소리를 지르면, 우는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문밖에 나와 울음이 멈출 때까지 다독거려주시던 어머니.

어머니가 저희들을 이렇게 키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3. 어머니의 걱정, 덜어드릴 수만 있다면...

김인순 <겨울밤>, 캔버스에 유채, 53㎝x45㎝, 1988년
김인순 <겨울밤>, 캔버스에 유채, 53㎝x45㎝, 1988년 ⓒ 이충렬
공장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온 어머니가, 밤 10시가 넘었지만 야근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바느질을 합니다. 아이는 아버지를 기다리다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편안한 표정으로 잠이 들었지만, 어머니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합니다.

돈 걱정, 아이 걱정, 남편 걱정… 80년대 공단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어머니의 모습을, '당대의 민중화가' 김인순 화백이 자신의 소시민적 삶과 안이한 창작태도를 통렬히 반성하던 시기에 그린 작품이라 '건강한 민중성'이 돋보입니다.

대다수의 여성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끈질기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을 때 과연 나의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중략) 좋은 예술이란 그것을 막연히 만들려 노력해서 나오는 게 아니고, 이 시대를 어떻게 사는가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 화가와의 인터뷰에서(가나아트 1989년 11·12월 합본호)

김인순 화백이 화폭을 통해 어머니의 '건강한 민중성'을 그리자, 당대의 '민중시인' 고 김남주 시인은 위의 그림에 화답이라도 하듯 <어머니의 손>이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어린 시절 신통했던 것으로 치자면
어머니 손을 덮을 것이 없었지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뜬금없이 배가 아파
방안을 온통 떼굴떼굴 굴러다니면
어머니는 나를 따뜻한 아랫목에 눕혀놓고
그 까끌한 손바닥으로 배꼽 주위를 슬슬 문질러주었지
그러면 영락없이 아픈 배가 싹 낫고는 했지
그러면 거짓말처럼 언제 내가 배 아팠냐 했지

- 김남주 <어머니의 손> 일부


'80년대'라는 시대가, 민주화를 요구하던 수많은 학생들과 인권운동가 그리고 노동자들을 감옥에 가두던 시대였고, 그들의 가족 특히 어머니들이 모여 '민가협'(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을 만들어 안기부로 교도소로 몰려가 항의하고 농성하던 시대였으니, 이런 그림, 이런 시가 나올 수 있었겠지요.

이렇게 어머니들이 거리로 뛰어나가야만 했던 시대도 있었으니, 어머니가 감당해야 할 몫이 어디까진지… 저희 '불효자'들의 아둔한 머리로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4. 어머니의 손, 가장 든든한 힘입니다

배운성 <시골길>, 한지에 수묵채색, 45㎝x30㎝, 1958년
배운성 <시골길>, 한지에 수묵채색, 45㎝x30㎝, 1958년 ⓒ 이충렬
어머니들의 자식 사랑은 남북이 다를 바 없습니다. 6·25 때 북으로 간 배운성 화백이 북한 어느 시골 마을의 아침 풍경을 스케치한 그림입니다. 당시 우리 농촌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아 시골에서 5리, 10리, 15리 길을 걸어 학교 가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마을에 또래의 동무들이 있으면 몇 명이 어울려 장난치며 가겠지만, 이 마을에는 또래가 없는지 어머니가 먼 길을 동행합니다. 행여나 길을 잃을까,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과 집안 어른 아침상을 차려드리고 설거지 할 틈도 없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마을 어귀를 나서는 어머니.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들은 그런 삶을 '여자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며, 우리들을 열심히 학교 보내시고, 형편이 되면 서울로 유학도 보내주시고, 대학에라도 들어가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기뻐하시며 소 팔고 땅 팔아 등록금을 보내주셨으니… 어머니, 당신들은 정말 열심히 저희들을 키워주셨습니다.

#5. 어머니, 우리의 진정한 스승

배운성 <우물가>, 다색목판화, 13㎝x21㎝, 1960년
배운성 <우물가>, 다색목판화, 13㎝x21㎝, 1960년 ⓒ 이충렬
학교 끝난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다 우물에 들렀는지, 저녁밥 지을 물을 길러 마을 어귀 우물에 왔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아들을 만났는지,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는 대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습니다.

밥짓고, 반찬 만들고, 빨래하고, 바느질하고, 밭일 거들며 시부모에게 '석삼년' 하고 남편에게 순종해도, 그래도 돌아오는 건 시어머니 잔소리와 남편의 버럭 화내는 소리… 그러다 남편이 어디 다녀오며 가루분이라도 한 곽 사들고 오면 분갑을 어루만지며 감격하던 어머니.

이렇게 작은 기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감격하던 당신이었기에, 우리들은 당신 그런 모습을 통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삶의 지혜를 하나, 둘, 깨우쳤으니… 어머니, 당신들은 저희 자식들의 진정한 선생님이고 인생의 스승이십니다.

#6. 제가 바로 어머니의 주름입니다

배운성 <여인 초상>, 종이에 연필, 28㎝x32㎝, 1966 년
배운성 <여인 초상>, 종이에 연필, 28㎝x32㎝, 1966 년 ⓒ 이충렬
자식들이 크면서 어머니는 늙습니다. 눈가에 잔주름도 늘고, 머리도 희끗희끗 해지시고, 손주들도 하나 둘 늘어가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다 큰 자식 걱정을 합니다.

부부간에 싸움 안하고 잘 사는지, 직장은 잘 다니는지, 장사는 잘되는지, 사업은 순탄한지, 손주들은 잘 크는지, 학교에서 말썽은 안 피우는지… 어머니로서의 걱정 뿐 아니라 할머니로서의 걱정까지 하시느라 주름살이 계속 늘어만 갑니다.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는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젊음을 바친 어머니이시기에, 자식들 앞에선 슬퍼도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도 힘들어하지 않고, 속이 상해도 내색하지 않고, "애쓴다", "잘될 거다", "수고한다", "걱정 마라", 그렇게 위로를 해주시다 자식이 돌아간 뒤에야 손으로 눈물을 훔치시는 어머니.

어머니, 당신들은 저희 자식들을 위해 그렇게 한 생을 사셨습니다.

#7.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강관욱 <침묵의 바다 1>, 석판화, 40㎝x56㎝
강관욱 <침묵의 바다 1>, 석판화, 40㎝x56㎝ ⓒ 이충렬
세월이 더 많이 흘러 할머니가 되신 어머니가 먼 바다를 바라봅니다. 배타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가, 아들을 기다리는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굽어진 등허리가 힘이 드신 듯, 한 팔로 뒷짐을 진 채 고개 들어 먼 바다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어머니.

그러나 이렇게 자식을 기다리며, 남편을 기다리며 사는 어머니가 바닷가에만 있겠습니까. 분단이 끝나기 전까지는 가슴에 박힌 대못을 빼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머니들이 아직도 남과 북에 수없이 많으니, 하루라도 빨리 이산가족들이 만나 회한 가득했던 지난날의 상처와 아픔을 서로 어루만지며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2000년 8월 이산가족상봉단의 한명으로 서울에 왔던 북한의 오영재 시인이, 몇 년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사진으로 나타난 어머니 앞에 눈물과 함께 바친 시 <오마니! 늙지마시라, 어머니여……>를 소개하며 이번 글을 마칩니다.

오영재 시인은 전남 장성 출신으로, 16살인 6·25 때 형 대신 의용군에 징집되어 북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편한 몸으로 한 살 난 여동생을 업고 강진에서 의용군 수용소가 있던 장흥군 대화국민학교까지 70리 초행길을 8월의 폭염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오셨던 어머니가, "너 잘 있는 것 봤으니 됐다"며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어둑어둑 해지는 길을 되돌아가시던 모습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오마니! 늙지마시라, 어머니여……
- 오영재

늙지마시라
늙지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이 가슴이 아픈데
세월아, 섰거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검은머리 한 오리 없이
내 백발이 된다 해도
어린 날의 그때처럼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내 죽어도 유한이 없어
통일 향해 가는 길에
가시밭에 피 흘려도
내 걸음 멈추지 않으리니

어머니여
더 늙지 마시라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여
내 어머니를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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