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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공원 입구에 있는 쉼터. 명당자리 입니다.
우리 동네 공원 입구에 있는 쉼터. 명당자리 입니다. ⓒ 김관숙
모처럼 친구가 승용차를 몰고 시원한 교외로 나가서 규모가 큰 냉면 전문식당에서 냉면을 샀습니다. 속상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식당 안은 점심 때라 그런지 손님들이 붐비고 시끌거리고 여기저기서 핸드폰이 울려대는 소리, 받는 소리 그야말로 분위기가 엉망입니다.

예약석에 앉은 우리 일행은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를 못하고 냉면맛을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묵묵히 냉면 한 그릇을 먹어치우자마자 바로 일어납니다.

음료수를 사들고 동네 명당자리로 갔습니다. 마침 은행나무 밑을 둘러간 돌 의자가 비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여기가 최고야"를 연발합니다.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이 있기는 해도 그늘이 시원하고 얼마나 조용한지 모릅니다.

은행나무 밑에서 나눈 자식들 여름휴가 이야기

자식들이 누리는 여름휴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요즘은 자식들이 휴가를 떠나도 아이들을 부모에게 맡기지를 않습니다. 교육 차원에서 일부러 아이들과 함께 가족여행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두셋의 친구 가족들과 어울려서 갑니다.

아이들이래야 하나가 대부분인데, 외국으로 가든 국내로 가든 여행은 외톨이로 자라는 아이에게 많은 체험을 하는 학습장 구실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와 좀더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사는 모습이 달라진 덕분에 연일 이어지는 폭염 속에서 손자손녀들을 맡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은 홀가분해 하는 목소리로 휴가여행을 떠났거나 떠나려는 자식들의 모습들을 자랑삼아 풀어 놓았습니다.

휴가 때 부모에게 봉투를 내놓는 자식들도 더러 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직장에 다니는 것도 여름휴가를 즐기고 사는 것도 다 부모님 덕분입니다, 맛있는 음식 사드시고 더위 이기세요'라는 의미가 담긴 그 하얀 봉투는 두께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말할 수 없는 효성과 사랑이 묵직하게 들어 있습니다. 직장에서 휴가비가 나오지 않더라도 생활비를 쪼개어 액수가 많든 적든 봉투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사실 아들네보다 내가 더 가졌잖아. 그래서 봉투를 안 받으려고 했는데 며늘애가 자기들 여행 간 동안에 '어머니 친구분들과 더위 이기는 음식 사잡수세요' 하는 거야. 그래서 받았지 뭐야. 내일은 말야, 며느리 말대로 내가 점심을 아주 거하게 살 테니까 기대들 하라구."

"우리 아들은 휴가여행 안 간다는데, 며칠이고 푹 자고 싶대나. 회사에서 휴가비도 안 나왔대. 요즘 휴가비 안 나오는 데가 더 많잖아. 그래도 수박 한 덩이 사들고 왔다가 가더라고."

"우리 아들은 휴가철에 봉투주는 거 몰라. 외식 같이 하는 건 알더군. 어제 큰아들네와 외식 같이 했는데, 아휴, 안 따라가는 것이 나을 뻔했어. 난 위가 안 좋아서 카레는 싫어. 자연히 난 부잡한 손자 녀석들 치다꺼리만 하게 되더라고."

"그래서 난 아예 안 낀다고. 아이들 위주의 외식을 하면서 툭 하면 왜 부르나 몰라."

"그래도 불러주면 고맙지 뭘 그래. '여름에는 엄마표 삼계탕이 최고야' 그러면서 몰려와서는 삼계탕 끓여달라면서 정신 쑥 빼놓고 가는 것보다는 낫잖아."

"하긴 그래!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말이 왜 있겠어."

"나만 당했나봐, 봉투는커녕, 아이구 분해"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습니다. 내 자식들도 여름휴가철에 부모에게 봉투 내미는 것을 모릅니다. 바라지도 않지만 아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를 못한 모양입니다. 자식들은 아직 결혼들도 안 해서 내게는 손자손녀들도 없습니다. 해서 나는 이 마당에 풀어놓을 이야기거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문득 냉면을 산 친구가 말했습니다.

"여전들 하시네, 나만 당했나봐. 봉투는커녕, 아이구 분해."

"무슨 말야? 그 집 아들은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 부모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할 거 같은데 말야."

"각별은 무슨. 글쎄 오늘 아침에 밥을 먹고 있는데 아들이 들이닥치더니 현관에 선 채로 아이를 들이밀면서, 다섯살짜리 아이에게 '할머니·할아버지랑 네 밤만 자면 돼' 하는 거야.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부부가 휴가여행 가는 길이래. 며늘애는 얼굴도 안 보여주고 1층 현관에 여행 가방이랑 계시고 말야."

"저런! 그래서?"

"정말 속상하고 눈물나대. 아이 못 봐준다고 했지. 하는 일도 없으면서 왜 못 봐 주냐는 거야, 기가 막혀서! 미리 전화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 아이를 봐주려고 했는데 말야. 결국 아이를 안 맡았지. 난 그런 무시당하고는 못살아."

"근데 왜 아이를 떼놓고 가지?"

"성지순례라 걷는 데가 많아서 그런대."

"좀 모질었네. 아이를 맡고 아들을 타이르지 그랬어. 다음부터는 이럴 경우 미리 전화로 말해라 나도 일정이 있다 하구 말야."

"서른 하고도 중반이 된 남자가 그것도 대학 때부터 외국생활 하느라고 고생한 놈이 그런 이치 모르겠어?"

그러나 친구들은 하나같이 냉면을 산 친구의 아들 행동에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아이를 맡지 않은 것은 백번 잘못한 것이라고들 했습니다. 할머니의 호통대로 아빠의 손에 끌려 되돌아서는 그 다섯살배기 아이의 마음을 생각해 봤냐는 것입니다.

"그건 생각 못했지. 나 분한 것만 생각하느라고 말야."

친구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습니다.

나는 친구에게 아들의 마음도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 나이에 아직도 떼쓰고 응석부리는 어릴 적같이 그렇게 어머니를 무조건 믿기 때문에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 아니냐고, 돌아보면 우리도 아이들이 고만 고만하던 젊었을 적에 친정어머니에게 그랬던 적이 얼마나 많았었느냐고, 그런 것이 우리네 정서가 아니냐고 하면서 잠시 잠깐 지난날들이 스쳐가게끔 하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젊었던 시절에 아주 오랫동안 피아노학원을 운영했던 친구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친정 어머니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피아노학원을 운영하지 못했을 친구입니다. 그러니까 아득한 그 시절에 친정어머니 덕분에 만만치 않은 돈을 벌었던 친구입니다.

문득 한 친구가 해결 방법을 내 놓았습니다.

"아들 귀국하는 날에 맞춰서 인삼 넉넉히 넣고 엄마표 삼계탕 푸짐하게 끓여라. 여름엔 말야 뭐니뭐니 해도 엄마표 삼계탕이 명약이거든. 엄마표 삼계탕 앞에서 웃지 않는 자식 없지. 그렇게 먼저 용서하는 맘으로 손 내밀면 아들도 며느리도 다르게 나올 거다."

모두들 그게 좋겠다고 꼭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대답을 안 합니다. 아직도 분이 안 풀린 얼굴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보내버린 아들내외가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보나마나 아들애와 며느리가 한바탕 했을 거야, 아이는 분당에 며느리 친정에다 맡겼을 텐데. 분당까지 들렀다가 인천공항에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출국시간을 대려고 얼마나 급하게 돌아쳤을까' 하고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비로소 안도하는 눈빛으로 웃음을 물었습니다.

토종 약병아리 구해서 삼계탕 끓여주시던 내 어머니

역시 어머니의 마음은 언제나 자식에게 가 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속을 홀랑 뒤집어 놓고 다시는 안 볼 것 같이 하고 돌아서도 어머니의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를 않고 붙박인 듯이 그 자식에게 가 있습니다.

나는 불현듯 집에 돌아가는 길에 수퍼에 들려 삼계탕 거리를 사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늘애가 더위 이기는 음식을 사 먹으라고 준 봉투로 내일 점심을 거하게 사겠다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부러운 마음과는 상관없이 그냥 나도 인삼 넉넉히 넣고 엄마표 삼계탕을 끓여서 자식에게 푸짐하게 먹이고 싶어졌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노란 얼굴로 골골거리는 나를 위해 어머니는 일부러 외가에 가서 풀밭에서 자란 시골 토종 약병아리를 구해다가 삼계탕을 끓였습니다. 그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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