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06 동천 '함께' 걷기대회 행사장에서 만난 국제패트롤잼보리 대원들
2006 동천 '함께' 걷기대회 행사장에서 만난 국제패트롤잼보리 대원들 ⓒ 안준철
연일 30도를 훨씬 웃도는 불볕더위가 계속되더니 오후가 되면서 하늘에서 간간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진기가 든 배낭을 둘러메고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서면서 저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하필이면 오늘 비가 오냐?"

올 여름에는 지겨울 정도로 비가 많이 오긴 했지만, 그 후로 보름 가까이 불벼락을 견딘 산천초목이나 땡볕에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과일들을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농부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반가운 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금방 주워 담으려 했습니다만.

어제(12일) 순천에서 '2006 동천 함께 걷기 대회' 행사가 있었습니다. 지난 9일부터 14일까지 5박 6일 동안 전남 순천시 서면에 자리한 청소년수련소에서 개최중인 '제 2회 국제 패트롤 잼버리(International patrol jamboree 2006)대회'에 참가한 세계 각국에서 온 5000여 명의 청소년(그중 장소 관계로 일부가 동천 걷기대회에 참가하였음)들과 함께 하는 행사였습니다.

대만에서 온 청소년들의 공연
대만에서 온 청소년들의 공연 ⓒ 안준철
비를 걱정했던 것은 이런 큰 규모의 행사가 때아닌 비로 인해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올해로 8회째를 맞이하는 순천청소년축제가 청소년들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고, 평가하는 바람직한 지역 청소년축제의 한 모델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헌신하고 노심초사해온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행사장까지는 약 2㎞쯤 됩니다. 평소에도 아내와 자주 걷던 길이고, 행사명도 걷기 대회이니 당연히 걸어서 행사장까지 갔습니다. 도착해서 시간을 보니 오후 4시 38분입니다. 행사가 시작하려면 약 20분이 남았는데 그때까지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후텁지근한 날씨를 식혀주는 시원한 비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행사를 준비하는 손길과 눈빛들은 그런 날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분주하기만 했습니다.

부채만들기-'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부채만들기-'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 안준철
잠시 후, 행사장에는 잼버리 특유의 멋진 복장을 한 얼굴색이 다른 청소년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한 친구는 예멘(Yemen)에서, 또 한 친구는 쿠웨이트(Kuwait)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두 나라는 같은 대륙에 속한 이웃나라입니다. 그들은 둘 다 10학년(고등학교 1학년)이고, 아주 친한 친구사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명랑하고 활달한 표정과 웃음이 저로 하여금 비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잊게 해주었습니다. 아니, 그 후로는 비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가끔 기계적으로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했을 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동천을 걷고 있는 단란한 가족
동천을 걷고 있는 단란한 가족 ⓒ 안준철
오후 5시 정각에 시작한 동천 걷기대회는 행사장에서 순천만이 보이는 쪽으로 약 2㎞쯤 걷다가 징검다리를 건넌 후에 다시 죽도봉이 보이는 쪽으로 2㎞를 걸어 징검다리를 건너서 행사장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시골길로 십리길인 약 4㎞ 구간인데 주최 측에서 주파시간을 무려 2시간이나 잡아놓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걷기대회가 진행되는 동천 주변에 색종이 접기(순천종이접기협회), 사랑의 붕어빵(순천강남여고), 부채 만들기(순천YMCA), 물풍선 던지기(전교조순천중등지회), 떡·주먹밥 나눠주기(순천교육공동체, 순천여성의용소방대), 종이비행기 날리기(전교조 순천사립지회), 봉숭화 물들이기(순천YWCA오라또래야), 전통차 시음(예원문화원 일화차회), 마술공연(매산고마술동아리), 민속놀이마당(전교조 순천중등지회), 코스튬플레이(순천고·순천여고), 재미있는 화학실험(전교조 순천사립지회)등 무려 12개의 부스를 설치해놓고 쉬엄쉬엄 구경하면서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걸어서 돌아오라는 것이었지요.

사랑의 붕어빵-강남여고 봉사동아리인 '엔젤스 프렌드'
사랑의 붕어빵-강남여고 봉사동아리인 '엔젤스 프렌드' ⓒ 안준철
순천 강남여고 봉사동아리인 엔젤스 프렌드(Angel's friend·여기서 천사를 의미하는 엔젤은 독거노인을 뜻한다고 합니다)가 학교 근처 공원에서 매주 1~2회 운영하는 사랑의 붕어빵(그 수익금으로 독고노인을 돕고 있다고 하네요)을 하나 얻어먹고 징검다리를 건너서 봉숭아물들이기 부스를 향해서 가는데 덩치가 만만치 않은 한 남학생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평생 걸을 거 오늘 다 걸었네!"

덩치 큰 녀석이 엄살도 심하다 싶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그 말이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침 7시 30분부터 밤 10시까지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라는 이름의 밀폐된 공간에서 그것도 딱딱하고 좁은 의자에 앉아 지내야하니 그럴 법도 하지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오늘 이렇게 확 트인 자연에 나와서 엄살이라도 피우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습니다.

동천의 맑은 물에서 노니는 흰 새들
동천의 맑은 물에서 노니는 흰 새들 ⓒ 안준철
제가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집에서 학교까지 약 40~50쯤 되는 거리를 동무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서 다녔었지요. 그러다보면 등교길 맞은 편에서 오는 여학생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하고, 그 한 순간을 위해서 하루를 애타게 기다리는 꽤 조숙한 친구들도 있었답니다. 비가 오는 날은 그야말로 노랫말처럼 '노란 우산, 빨간 우산, 찢어진 우산'들이 진풍경을 이루곤 했었지요.

그 무렵, 우리 학교에 3층짜리 도서관이 있었는데 방과 후에는 도서관으로 직행하여 밤이 이슥하도록 소설책을 읽다가 배가 고파 반쯤 접혀진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은 그때가 60년대 말이었는데 어떻게 소도시의 작은 학교에 그렇게 크고 근사한 도서관이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지금처럼 나라가 잘 잘지도 못하고, 스쿨버스도 없고, 자가용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는데 말입니다.

연꽃차 시음장에서- 순천청소년축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돋보인다.
연꽃차 시음장에서- 순천청소년축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돋보인다. ⓒ 안준철
어제 2006동천 함께 걷기 대회를 마치고, 동천 만남의 광장 특설무대에서 열린 '동천 한여름 밤의 콘서트'행사를 관람한 뒤에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연의 속도'라는 말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우리가 걷는 속도가 바로 자연의 속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저는 차도 없고 면허증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닙니다. 사람들이 언제쯤 차를 살 거냐고 물으면 그냥 웃고 말지만 제 속으로는 언제 차를 사더라도 좀 더 미루다가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면 안 사고 말든지요.

그것은 제가 지금까지 누구(사람이든 자연이든)를 위해서 이렇다할 선행을 베푼 기억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차라도 없으면 그만큼 공해도 적어질 터이니 그거라도 끝까지 가보자는 속셈이지요.

여중생들의 반란-순천여중 밸리댄스 동아리 학생들의 공연
여중생들의 반란-순천여중 밸리댄스 동아리 학생들의 공연 ⓒ 안준철
60년대 말에는 작은 학교에 3층 짜리 도서관이 있었는데 세계 경제 대국이라고 자칭하는 오늘날은 1층 짜리 도서관도 없는 학교가 많은 기현상도 저는 그동안 우리 교육이 '자연의 속도'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핵심이 바로 입시교육이지요.

책을 읽고 감동을 하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 자연의 순서인데, 시간이 없으니 앞에 두 가지는 모두 생략하고 읽지도 않고 감동한 적도 없는 독후감을 감동적으로 쓰기 위해 학원에서 고액과외를 받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지상과제인 입시를 위해서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기 좋아하는 말로 세계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어리석은 교육은 이제 그만 종지부를 찍어야지요.

축제는 어쩌면 잠시 쉬어 가는 마당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쉼이 바로 문화요 창조이지요. 자연도 긴 겨울의 쉼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하여 언제나 변함없는 봄의 감동을 이루어내지요. 봄이면 어김없이 산과 들에 피어 그 고운 빛깔로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들꽃도 그런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자연의 속도 말입니다.

이런 삶의 지혜와 낭만, 그 중심에 순천청소년축제가 있으니 저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이것이 또한 제가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순천청소년축제'는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교육문화 창출을 위한 교육연대의 기틀을 다지고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지난 1999년 순천지역의 대표적인 청소년 관련단체인 순천교육공동체시민회의, 순천YMCA, 순천YWCA, 전교조 순천지회, 전남청소년상담지원센터 등 5개 단체가 모여 제 1회 청소년 축제를 개회함으로써 막이 올랐습니다. 지금은 순천시가 주최하고 순천청소년축제위원회가 주관하여 행사를 치르고 있으며, 올해로 8회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