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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출생한 박해람 시인의 첫 시집.
강릉에서 출생한 박해람 시인의 첫 시집. ⓒ 랜덤하우스중앙
박해람 시인의 첫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에서 발견되는 두드러진 특징은 '선언(宣言)적 시 쓰기' 혹은 '제시(提示)적 시 쓰기'이다.

대부분의 시의 앞자락을 살펴보면 이러한 특징은 쉽게 감지된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다시 몇 가지 종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상황 제시'이거나 '사건 제시'이다. "뿔각 사슴이 있다"('위험은, 기억을 키운다.'에서), "사내의 울퉁한 팔뚝에/한 시절의 순정이 명중되어 있다"('명중'에서), "몸의 흉터와 같이/운석이 떨어진 자리는 움푹 패어 있다"('운석이 떨어진 자리'에서), "한동안 피 맛을 보지 못한 칼에서/붉은 피가 스스로 배어나오고 있다"('칼을 위한 변명'에서) 이렇게 선뜻 상황을 내놓기도 하고

"며칠 동안 지독한 악취의 근원지를 찾았을 때 그곳에는/죽은 고양이 시체가 거의 다 썩어 있었다"('빈 냄새'에서), "잠든 아이를 등에 업고 서성거린다/아이가 자꾸 흘러내린다"('아이가 자꾸 흘러내린다'에서), "동사무소 이층 복지회관 러닝머신 위를/몇 명의 여자들이 걷고 또 걷는다"('천공의 성(城) 라퓨타'에서), "길을 걷는데 내 손을 잡아끄는 사람/버드나무같이 생긴 여자의/팔과 손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수맥 탐지자' 중에서) 이렇게 어떤 사건을 내놓기도 한다.

'상황'과 '사건'의 경계는 모호하고 어설프지만(하나로 통합해서 보아도 좋을 것) 대체로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설명이 부족하다면 '모습'과 '움직임'으로 구획하여 보면 어떨까?

생각하면 이러한 요소들은 시의 출발 지점이자 배경을 이루는 것들이 된다. 이를테면 시는 마치 이야기를 이루고 이 이야기의 도입을 이루는 부분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자기 고백'이거나 '자기 독백'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몇 년 사이 몇 개의 호칭을 잃어버린다"('호칭을 잃어버리다'에서), "나는 늘 망태처럼 배부른 산을 업고 다녔다"('등 뒤의 산'에서)면서 자신을 돌이키기도 하고 "내가 지금부터 할 일은/당신들 눈 속의 검은 커튼을 열어젖히는 것이다"('마술사'에서)면서 새삼 자신의 의무를 강조하기도 한다.

세 번째는 '사물과 대상에 대한 각성과 사유'이다. "트럭에 가득 실려 가는 휘어진 철근들 보면/저들도 어느 마음에서 고생깨나 했다는 생각이 든다"('세월의 밥'에서)나 "미성년의 나이는 아주 더디게 흘러간다"('소년원'에서)는 '사물과 대상을 관조함에서 비롯한 각성'을 보여준다.

좀더 확장적이고 포괄적인 '사유'를 내놓기도 한다. "모든 존재의 마지막 소리는 삐걱거림이다"('싱싱한 삐걱거림'에서), "몸을 관통해 나가는 것들 다 목적지가 있다/그리고 다 냄새가 나는 것들이다"('향기와 냄새'에서)며 '존재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기도 하고

"아주 오래 묵은 사랑은 동성(同性)이 되더라"('대기권'에서), "허공의 천직은/무게를 가늠해주는 일이다"('허공의 무게'에서), "모든 병의 주소는 싱싱한 몸이다"('낯선 이웃과의 조우(遭遇)'에서)고 하여 '삶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 이러한 시 쓰기의 효과는? 독자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시적 상상력을 환기시키고 배가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문제 영상을 틀기도 하고 충격 영상을 켜기도 한다.

어쩌면 이는 요즘 시대의 시 읽기 방식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른다. 즉 속도감 있는 시 읽기를 자극하는 것이며 시가 외면당하지 않도록 독자를 붙잡아매는 구실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시인이 독자에게 건네는 표정과 말투와 몸짓을 바라보며 시집에 다가가는 것도 바람직한 시 읽기 방식일 것이다.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많은 틈이 있다니!"('실종'에서) 할 때의 표정과 "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저 달을 좀 봐"('달'에서) 할 때의 몸짓을 말이다.

덧붙이는 글 | * 지은이: 박해람 / 펴낸날: 2006년 6월 30일 / 펴낸곳: (주)랜덤하우스중앙 / 책값: 6000원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

박해람 지음, 달샘 시와표현(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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