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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전 물들인 양말.요즘에야 양말 목이 조금 늘렁거릴 뿐 뽀송뽀송한 느낌이 좋아 즐겨 신는다.
ⓒ 한지숙

큰 비 오기 전에 황토염색을 해야 해서 서두른 작업, 수십 마의 광목을 정련하는 중이었다. 비가 잠시 멈추면 내다 걸고, 빗방울 떨어지면 모두 거둬들이고, 다시 말리고 거두고. 이렇게 사나흘 들락이며 온전히 마를 날 없었던 원단은 이제 서서히 지쳐가는 듯, 작고 습한 방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상해가다 아예 곰팡이꽃이 피었다.

역류한 빗물로 인해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지 못해 더 답답하지만, ‘양동이로 들이붓듯, 물이 일어서서 걸어오듯’, 이런 표현까지 남긴 태풍과 장마였으니 이런 때 내가 겪는 불편은 아주 작은 것이려니.

▲ 밝고 화사한 황토나 적토를 선호하지만 나는 요즘 이 빛깔의 황토가 좋다. 진짜 '흙'처럼 느껴져 포근하다.
ⓒ 한지숙

나는 황토로 염색을 시작했고, 가장 많이 해본 염색이 황토염색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경험담과 실패담엔 늘 귀가 솔깃하고 황토염색에 대한 애착 또한 크다.

▲ 5년 전 충북 진천에서 황토염색을 제대로 해본 첫 티셔츠. 신고 있던 양말까지 퐁당 담가 주물렀다.
ⓒ 한지숙

흙은 그냥 ‘흙빛’이 있는가 하면 적토(赤土), 선홍빛, 핑크빛, 백토(白土) 등 빛깔이 다양하다. 얼마 전엔 도예가의 작업실에서 자줏빛의, 참으로 묘한 어우러짐의 붉은 기운이 어린 흙까지 보았다. 양동이랑 꽃삽 챙겨들고 멀리 다른 면(面)의 야산까지 다니며 일일이 캐서 쓰는 그의 흙이 무척 탐났으나 차마 한 주먹 달랠 수가 없었다. 흙 캐러 갈 때 꼭 데려가 달라고 떼쓰는 것으로 다짐만 겨우 받아둔, 좋은 염료에 대한 욕심을 또 부렸다.

▲ 황토물에 치자물 내린 것을 섞은 복합염. 은은한 치자향이 스며나오고 화사하여 기분마저 밝아진다.
ⓒ 한지숙

흔히들 ‘좋은 황토’의 조건과 황토염색의 ‘정석’을 말한다. 땅속 1m 깊이에서 채취한 흙이 좋다, 아홉 번 정도 수비한 지장수에 흙을 풀어야 좋다, 황토물에 옷감을 푹 담가 거품이 일도록 치댄다, 주무르는 동안 옷감이나 손이 밖으로 나오면 얼룩이 진다, 고착제를 사용해야 물 빠짐이 적다 등등.

▲ 얼었다 녹았다, 수비가 잘된 찰진 황토를 거름망에 내려준다.
ⓒ 한지숙

황토염색에 대한 나의 생각은, ‘정석은 없다’이다. 수비와 정성껏 치대기, 기본적인 흐름을 잘 따라 얼룩이 지지 않게 정성을 들이고, 여러 번 세탁해도 부위별로 물이 안 빠지면 성공하는 것이 아닐까. 옷감의 올바른 정련이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자연스레 물이 빠져야 진짜 자연염색이라느니, 물이 안 빠지는 건 화학염료를 첨가해서 그렇다는 둥 설왕설래가 있지만, 고집스레 제대로 물들였다고 생각했는데도 2년 정도 지나니 그 빛이 바래더라. 자연염색의 물빠짐은, 세월이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 주무르고 치대고. 팔목이 시큰거릴 정도의 중노동이지만 결과를 생각하면 이 정도쯤이야.
ⓒ 한지숙

나의 황토염색 방법도 특별한 것은 없다. 정련은 무조건 제대로, 다섯 번 이상 치대고 주무르고, 후처리는 반드시 콩물로!

흙을 채취하여 한두 해 묵힌다. 급할 땐 수비가 잘된 흙을 구입하기도 하지만 수비의 과정도 기다림의 시간이다. 묵은 장이 진하고 맛있듯 얼렸다 녹였다 계절을 넘나들며 숙성된 흙에선 찰기가 느껴지고 이럴 때 손을 담가 주무르면 찰흙놀이를 즐기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흐뭇하다.

자주 저어 윗물 따라버리길 반복하며 물을 갈아준다. 염색의 준비가 다 되었으면 필요한 양만큼 차진 흙을 건져내 거름망에 받친다. 모래나 벌레 등 알게 모르게 뒤섞였을 불순물을 걸러낸 황토물에 뜨거운 물을 붓고 소금을 한 움큼 넣는다. 찬물도 미지근한 물도 다 되지만 높은 온도에 물드는 속도가 훨씬 진하고 빠르더라.

▲ 흰 메주콩을 하룻밤 불려 콩물을 내린다. 원액에 물을 섞어 사용. 본 염색 전이나 맨 나중에 한다.
ⓒ 한지숙

정련을 잘해둔 천을 담가 주무르고 치대고, 때론 밟기도 한다. 그냥 옷감이나 수건 등은 한 면이니 수월하지만 양말이나 속옷 등의 의류는 뒤집어서 또 치대 주어야 황토입자가 고루 스며든다. ‘황토염색은 염착이 아니라 흡착’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 내 나름의 주장이다.

주무르고 수세하는 과정의 반복을 하는 다른 염색과 달리 황토염색은, 주무르고 말리고, 뒤집어 주무르고 말리고를 대여섯 차례 반복한 다음에 빤다. 빨 때마다 참 징하게도 황토물이 나오는데 거의 희부연 물이 나올 때까지 빤 다음, 더는 물빠짐이 없도록 탄닌(콩즙) 처리를 하여 마무리한다.

▲ 수건을 대량으로 염색할 때는 밟기도 한다. 맨발로 진흙탕에서 뒹구는 기분, 머드팩이 따로 없다.
ⓒ 한지숙

콩즙은 흰 메주콩을 하룻밤 불려 갈아준 다음 그 즙을 내려 물과 섞는다. 콩즙의 양을 가늠하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나의 경우, 면 티셔츠 30벌에 콩 반 되 정도 사용한다. 콩즙 대신 우유로 대신하라고 일러주는 선생님도 있다는데 썩 권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잘 씻어도 우유 냄새가 남아 불쾌감이 따라다니고 한여름엔 또 오죽하겠는가. 콩물 내리는 것이 귀찮아도 우유로 마무리한 뒷처리 때문에 따라다닐 역겨움은 피하고 볼 일이다.

▲ 콩물을 먼저 입힌 다음 주무르고 말리고 세 번 반복한 뒤 척척한 채 비닐에 담아 따뜻한 아랫목에서 하룻밤 재운 티셔츠. 좀더 숙성되었으려니, 새로운 경험이었다.
ⓒ 한지숙

쨍하게 말간 볕이 그리운 날, 황토로 신나게 물들이고 싶은 마음을 하늘이 좀 알아주면 기쁘련만 장맛비는 아직도 미련이 많은가 보다. 오늘도 선풍기와 온풍기가 함께 돌아간다.

덧붙이는 글 | 장맛비와 눅눅한 날이
보름 이상 이어집니다.

곰팡이 피어난 옷감들을 바라보며
쨍한 볕을 그립니다.
신나게 물들일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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