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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 궁전의 화려한 호박방 내부. 노란색, 오렌지색의 반짝이는 음영 속에서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의 화려한 호박방 내부. 노란색, 오렌지색의 반짝이는 음영 속에서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다. ⓒ 정인고

나무 모양의 프랑스 시계와 벽화 등이 가미된 화려한 장식이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나무 모양의 프랑스 시계와 벽화 등이 가미된 화려한 장식이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 정인고
"호박방이 왜 그리 특별한 걸까요?"
"호박방은 모든 소장가들이 갖고 싶어 하는 보물이죠. 19세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 역시 일관되게 호박방에 매료되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전체를 호박으로 꾸민 방을 상상해 봐요."(소설 <호박방> 중)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외곽으로 약 1시간 정도의 거리인 푸쉬킨시에는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예카테리나 궁전이 있다. 이 궁전 8번 방에는 사방 14m, 높이 5m의 방 전체가 호박 세공품과 화려한 금장식, 우아한 피렌체 스타일의 모자이크로 장식된 세계 8대 불가사의 '호박방'이 있다.

복원하는 데에만 24년이라는 시간과 11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다. 24년과 110억이라는 숫자로 '호박방'의 가치를 표현할 수 없다. 세계 유일의 신비의 방 '호박방'의 가치는 박물관내 호박방 관리인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니 즈나유.(모르죠)"

14m×5m 방 전체를 호박과 화려한 금장식으로 장식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지은 <메타모르포세이스>에 따르면, 파에톤은 '태양의 신'인 아버지 헬리오스를 졸라 네 마리의 말들이 끄는 태양마차를 몰게 되었다. 하지만, 파에톤이 말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하늘과 땅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자 제우스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벼락을 내려 파에톤을 전차에서 떨어뜨렸다. 파에톤의 시체는 불이 붙은 채 에리다노스 강으로 빠졌다.

이때 강에 떨어져 불타는 파에톤의 몸을 보고 파에톤의 이복누이들(헬리아데스들)은 어머니 클리메네와 함께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파에톤의 무덤 앞에서 4개월 동안 통곡하다가 포플러로 변했다. 이 나무껍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호박(瑚珀)으로 변해 에리다누스 강에 떨어져 여성들의 장신구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호박이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신화이다. 이 신화로 인해 호박을 '헬리아데스들의 눈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특유의 매혹적인 색깔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태양의 물질'이라는 의미의 '일렉트론'이라 불렀고(호박을 문지르면 정전기가 발생한다), 러시아인들은 '바다의 향', '바다의 거품', '야생벌의 꿀'이라고 불렀다.

호박은 일반적으로 흔한 오렌지색, 노란색으로부터 보기 드문 흰색, 녹색, 파란색까지 수 백 가지의 다양한 빛깔을 가지고 있어 색채의 마술사라 불린다. 또 영화 <쥬라기 공원>으로 잘 알려졌듯이, 호박 내부에는 오늘날 멸종된 각종 곤충과 식물들이 존재하여 '타임캡슐'이라 부르기도 한다.

호박을 이용한 귀걸이와 부적들이 신석기 시대의 유물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로마 시대에는 투명하고 밝은 황금색 계열의 호박을 이용한 반지와 작은 조각상들이 제작되기도 했다. 또한 중국에서는 종교적 행사나 의례식 때 호박을 태워 그 연기를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호박향을 피워 질병을 치료하고 과일을 여물게 했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내 8번 방에 '호박방'이 위치하고 있다. 궁전 앞에 길게 늘어선 관광객들.
예카테리나 궁전내 8번 방에 '호박방'이 위치하고 있다. 궁전 앞에 길게 늘어선 관광객들. ⓒ 정인고
18세기 프러시아 왕비 위해 제작... 피터 대제가 러시아로 가져와

하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며 다양한 재료로 쓰이고 수 많은 전설을 가진 호박이 '호박방'의 모습으로 탄생하게 된 것은 18세기다.

1700년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1세는 왕비 소피 샤르로테를 위해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의 재건축을 시작한다. 그는 왕비 소피 샤르로테를 위해 궁전의 한 방을 자신의 소장품으로 보관 중인 궁전의 호박들로 내부 장식을 치장하고자 했다. 바로 이때 호박방에 대한 발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음해 덴마크인 조각가 고트프리드 볼프람은 호박방 장식을 맡게 되고, 1706년 한 면의 호박방 벽이 완성된다. 그의 뒤를 이어, 1707년 에른스트 샥트와 고트프리트 투라우가 호박방 작업에 5년을 더 매달리지만, 왕비 소피샤르로테의 죽음으로 작업은 일시 중단된다. 이어 1713년 프리드리히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왕위에 오르며 황실의 모든 호사스런 작업들은 완전히 중단된다.

한편,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쿤스트 카메라)을 짓고 있던 피터 대제는, 1713년 베를린 방문시 직접 보았던 신비의 호박방을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간직하고자 했다. 그러다가 1716년 프러시아 방문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로부터 그토록 원하던 호박방을 선물로 받게 된다. 이에 대한 답례로 피터 대제는 자신의 장신 정예병 55명과 직접 만든 포도잔을 선물했다고 한다.

러시아로 건너온 호박방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에르미타쥐 박물관)을 먼저 장식하게 되었는데, 1755년 엘리자베스 여제는 자신의 여름별장인 예카테리나 궁전에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화려한 방을 만들기 위해 이 호박방을 가져온다.

96㎥의 거대한 방은 금빛 찬란한 호박 이외에도, 궁정 건축가 라스트렐리에 의해 거울과 금박을 입힌 청동틀, 4개의 피렌체 스타일의 모자이크 그림들, 화려한 광채가 나는 금 장식 등이 가미되어 신비로움이 가득한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한다.

이후 수 백 년을 거치는 동안 호박방은 여러 번의 보완과 보수 작업을 거치게 된다. 1940년대 또 한 번의 보완작업을 계획하지만, 2차세계 대전의 발발로 계획은 무산된다.

2차대전 독일군의 침공 와중에 감쪽같이 사라져

예카테리나 궁전 내부. 이 궁전의 길이는 무려 250m이지만, 각 방의 문이 일직선상에 있으므로 문만 열어놓으면 끝방까지 보인다.
예카테리나 궁전 내부. 이 궁전의 길이는 무려 250m이지만, 각 방의 문이 일직선상에 있으므로 문만 열어놓으면 끝방까지 보인다. ⓒ 정인고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침공하자 소련정부는 박물관의 소장품들을 열차에 실어 83일(9월 16일까지) 동안 시베리아 지역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호박방의 호박들은 하나의 큰 판넬로 부착되어 있어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고, 너무 약해 손상의 위험이 있었다.

결국 호박방은 철거하지 못하고, 독일군의 공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종이와 솜으로 호박을 덮었고 창문을 나무판으로 덮고 사이에 모래를 넣었다. 1941년 9월 17일 호박방이 위치한 예카테리나 궁전은 독일군에게 넘어간다.

점령후 도착한 독일군의 <예술위원회> 전문가들은 36시간 만에 호박방을 철거하고, 동프러시아 지방으로 옯겨간다(이때 4개의 피렌체 모자이크 중 그림 하나가 사라진다). 이후 호박방은 쾨니히스베르크 성에 다시 세워지고 소장품 번호 200이라는 숫자로 전시되게 된다. 이후 호박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당시 호박방 관리인이었던 로데 박사는 연합군의 폭격이 있었던 1945년 4월 9일과 10일 사이에 건물의 북쪽으로 옮겨졌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호박방이 위치했던 쾨니히스베르크 성은 폭격으로 심하게 파괴되었는데, 잿더미 속에서 호박방의 일부 조각들이 발견되자 당시 소련 특별위윈회 전문가들은 폭격으로 인한 소멸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이후 소련 정부는 1967년 '호박방 특별 수색위원회'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수색에 나선다. 하지만 수 십 년간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자, 1984년 특별위원회의 업무를 완전 중단시키고, 1979년 발족된 호박방 복원 프로젝트 <기적의 호박>을 중심으로 호박방 재건작업에 전념을 다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50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24년간의 복원작업은 완료되고, 20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창건 300주년을 맞이하여 호박방은 62년 만에 다시 세상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온갖 추측과 소문은 아직도 무성하다. '호박방' 미스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과연 폭격에 의해 불타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호박방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옮겨간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현재 호박방은 어디에, 누군가의 손에 있는 것인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호박방의 비밀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독일군이 가져갔다" "아직도 지하에..." 다양한 가설들

▲ 그림 액자의 둘레에는 구약성서가 호박으로 세밀하게 조각돼 있다.
ⓒ정인고
1945년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진 호박방에 대한 가설과 추측은 그 신비스러움 만큼이나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 중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4가지 가설을 살펴보자.

첫 번째, 쾨니히스베르크 지역을 조사한 전문가들은 독일군들이 호박방을 이 지역 밖으로 가져가지 못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직까지도 발견하지 못한 이 지역 어딘가 비밀벙커 내부에 숨겨져 있을 거라는 것이다.

두 번째, 첫 번째와는 상반되는 가설로, 호박방은 쾨니히스베르크 지역을 벗어나 수로를 통해 독일의 다른 지역이나 대서양을 건너, 남미 지역까지도 옮겨졌을 가능성이다.

세 번째, 호박방을 실은 상자들이 동프러시아에서 서프러시아 지역으로 옮겨져 현재의 폴란드 지역에 숨겨졌을 가능성이다.

네 번째,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다른 보물들과 함께 3국으로 옮겨져 당시 여러 비밀벙커들을 찾아낸 후 점령했었던 미군이 가져갔을 가능성이다.

한편, 이외에도 전문가들은 프러시아 지방의 요새들을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구소련 연방의 어딘가에 깊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많은 가설들이 존재하지만, 중요한 건 모두 호박방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어딘가에 호박방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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