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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유일의 한국어 방송인 KTV의 김춘자 국장
러시아 유일의 한국어 방송인 KTV의 김춘자 국장 ⓒ 김혜원
"까레이스키, 짐치스키, 고려놈, 김치냄새 나는 놈. 한인 비하 표현들입니다. 88올림픽 이전만 해도 러시아에서 한인은 멸시와 차별의 대상이었죠. 1세대나 저 같은 2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3세대인 제 딸도 초등학교 때 '까레이스키'라고 친구들이 놀려 울면서 집에 돌아오기도 했죠. 지금은 달라졌어요. 러시아에도 한류 바람이 불고 있죠. 예전에는 한인들이 파는 야채는 '야매'라고 얼마나 무시했다고요. 이제 그런 일 없어요. 오히려 한국 음식 배우려고 하죠."

사할린의 유일한 한국어 방송 KTV 김춘자 국장의 말이다. 160여 개 민족이 살고 있는 다민족 국가 러시아, 사할린에는 소수민족 유일의 TV 방송이 있다. 한인을 대상으로 한 사할린 우리말 방송은 1956년 설립해 일제시대 강제 징용된 한인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라디오 방송(중파 531KHz)과 2004년 광복절에 개국한 텔레비전 방송 KTV를 운영하고 있다.

'소수민족 유일의 TV 방송'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KTV는 러시아에서 한국과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네 시간뿐이긴 하지만,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사할린의 한인 소식을 다루는 30분짜리 자체 뉴스를 내보내고 금요일에는 드라마 <대장금>, 토요일에는 <열린 음악회>, 일요일에는 <대장금> 재방송을 내보낸다. <가을동화> <태양인 이제마> 같은 드라마도 KTV 전파를 타고 사할린 전역에 방송됐다.

지난 17일 서울 동대문구 광희동의 일명 러시아골목에서 KTV의 김춘자(55) 국장을 만났다.

두부 팔아 자식 키운 억척어멈, 나의 어머니

김춘자 국장은 사할린 남부의 작은 항구 도시 고르사코브에서 제주도 출신인 아버지 김윤구(1896년 생)와 평양 출신인 어머니 조희숙(1912년 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할린 한인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강제 징용자는 아니다. 제주도에서 자란 아버지는 일본에 건너갔다가 돈을 벌기 위해 사할린으로 넘어왔다.

"당시 한인들은 벌목장이나 탄광, 비행장 건설처럼 남들이 하지 않는 일, 힘든 일만 했어요. 강제 징용은 아니었지만 해방 후 일본인들에게 버림 받은 건, 강제로 끌려온 분들하고 똑같았죠. 전쟁 말기에 도망갈 때도 일본인들은 한인들을 데려가지 않았어요."

종전 후 조국으로 갈 방법이 막혀버린 사할린의 한인들은 어쨌든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김 국장의 어머니는 두부를 만들어 자식들을 키우고 공부시켰다.

"아버지는 옛날 분이라 딸들이 공부를 많이 하는 걸 원치 않으셨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죠. 평양 출신이셨던 어머니는 자식들을 훌륭하게 공부시켰죠. 어머니는 두부를 참 잘하셨어요. 그때 기계가 어디 있어요? 다 맷돌로 갈아서 손으로 했지요. 우리 어머니 고생 많이 하셨어요. 저도 초등학교 2, 3학년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맷돌 돌렸어요. 한 판을 하면 여덟 모가 나오는데 한 모에 1원씩 팔았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평양 출신의 억척어멈이었던 어머니는 김씨에게 "먹는 것과 배우는 것은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배운 것은 언젠가는 써먹기 마련이고 일을 하고 힘을 쓰려면 잘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인지 김춘자 국장은 러시아인도 쉽지 않다는 이르쿠츠크 외국어대학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공부하는 엘리트 과정을 밟을 수 있었다.

한국 노래 틀 수 없었던 러시아방송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춘자 국장.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춘자 국장. ⓒ 김혜원
1982년 김씨는 사할린의 유일한 한국어 신문인 <새고려신문>에 입사했다. 그 후 1986년 사할린국영방송국에서 기자와 통역일을 하다 사할린 우리말 방송으로 옮겼다.

페레스트로이카(1985년 선언된 소련의 사회주의 개혁 이데올로기)와 글라스노스트(고르바초프가 내세운 정보공개를 통한 개방정책)로 격변기를 겪고 있던 1988년 소련. 그 변화의 바람을 타고 김씨는 한국어 라디오 방송 최초로 한국의 흘러간 노래를 내보낼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한인들의 뉴스를 다룰 수도, 한국 노래를 틀 수도 없었다. 한국말로 된, 한국적인 선율이 담긴 노래가 전파를 타는 순간,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에 휩싸였다. 몰래 숨어서 KBS 사회교육방송을 듣던 한인들의 기쁨은 비길 바 없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이전에는 러시아 방송에서 한국과 한인에 대한 소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한 나라에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취급을 받았던 것. 올림픽 등 국제적인 행사를 통해 한인들은 그 존재를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었다. TV에서 한국 사람과 한국의 발전상을 처음 본 한인들이 기뻐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건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그리고 한국 경제의 급성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한국이 잘 살아야 해외에 살고 있는 한인들도 기가 삽니다. 이제 러시아에서는 누구도 까레이스키라고 놀리지 않아요. 오히려 한류 붐을 타고 한인들 인기가 더 높아졌습니다. 그동안 차별과 억압 속에서 살아왔던 한인들도 이제는 어깨를 펴고 삽니다. 한국인임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한다고요."

1988년 8월 15일. 김씨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러시아공영방송에 처음으로 러시아인이 아닌 다른 민족의 뉴스가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자신이 기획하고 취재한 '한인들의 광복절 행사' 뉴스는 공영방송에 한인들이 등장한 최초의 사례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김 국장은 그때의 뉴스 멘트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지금까지 러시아에는 문화적 공황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런 뉴스를 통해 길고 어두운 공황의 시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음을 감격스럽게 생각하면서 사할린 문화휴식공원 내 코스모스경기장에서 열린 한인들의 광복절 기념행사 뉴스를 전합니다."

이후 김 국장은 한인들을 위한 TV 방송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 노력은 2004년 8월 15일 KTV 개국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국사람 만나면 '대장금' 얘기부터

사할린 국영 라디오및 TV방송국 산하 한국어 방송국 홈페이지. 소수민족 유일의 TV 방송국인 KTV는 만성적인 재정난을 겪고 있다.
사할린 국영 라디오및 TV방송국 산하 한국어 방송국 홈페이지. 소수민족 유일의 TV 방송국인 KTV는 만성적인 재정난을 겪고 있다.
사할린의 KTV는 러시아 내 소수민족의 자국어 방송,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징용이나 노역으로 끌려온 1세대의 한을 어루만지고 2, 3세대들에게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유일한 통로이자 억눌렸던 민족적 자긍심과 자존심을 찾게 해주는 유일한 한국문화 창구이기 때문이다.

또 <가을동화>나 <대장금>의 드라마를 통해 러시아에 한국문화를 알리고 있다. 김 국장은 사할린 뿐만 아니라 대륙 본토에서 온 사람들도 자신을 만나면 <대장금>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면서 그 덕분에 한국 음식이나 한민족에 대한 인식도 좋아졌다고 전했다.

"작년 한국의 한 방송사와 함께 한국 방송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유즈노사할린스크(사할린 주의 주도) 거리를 지나는 러시아인 대부분이 <대장금>을 봤다고 하더군요. 사할린 인구를 40만으로 본다면 적어도 1/10인 4만명 정도는 한국어 방송을 보는 것 같아요. 소수민족인 한민족의 자국어 방송이 10%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죠."

정부지원 끊겨 방송국 존폐 위기

하지만 KTV는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 재정 지원을 해오던 러시아국영방송공사가 2005년부터 지원 중단과 함께 보조금까지 삭감했기 때문. 국가적인 재정 위기를 맞아 상당수 방송국을 폐쇄 조치하고 있는 상태라 소수민족인 한인을 위한 방송을 남겨 둔다는 보장을 할 수 없는 상태다. 광고를 유치할 수도 있지만 사할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기업이 없어 광고 영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방송국 운영에 필요한 재정은 라디오와 TV를 합해 최소 월 6500달러. 다행히 2004년 개국부터 한국에서 기자재나 콘텐츠, 운영비 등의 도움을 받았고 지난해에도 한국을 들어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프로그램 제작도 줄어들고 총 방송 시간마저도 줄어들어 내년에는 방송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

"한국말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노인들에게 우리말 방송은 유일한 보도 수단이며 삶의 낙입니다. 우리말 방송국 직원 모두는 구소련 공산당의 민족정책에 의해 폐교된 한인학교들을 다시 재건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말 방송국이 폐국 처리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한인들의 민족혼과 자존심을 살리는 일이니까요."

인터뷰를 마칠 즈음 기자의 머릿속에는 김춘자 국장이 '사할린의 이금희'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할린의 많은 한인들은 아직도 김춘자 국장이 하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기억한다. 사할린의 한인들에게 그녀는 단순한 방송 진행자가 아니다. 외로움과 서러움의 세월을 살아온 러시아 동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딸이자 친구이며, 어머니이자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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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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