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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차린 밥상. 채식 위주의 소박한 밥상이지만 다섯 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이 밥상을 차리려면 두어시간이 걸린다.
여자가 차린 밥상. 채식 위주의 소박한 밥상이지만 다섯 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이 밥상을 차리려면 두어시간이 걸린다. ⓒ 권혁란
가축 : 야생동물과 달리 주인이 밥을 챙겨 먹여 키우는 동물. 스스로 밥을 챙겨 먹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이 밥을 챙겨주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 그러나 밥 먹여준 은혜를 알고 주인을 따른다.

남편 : 1. 부인이 밥을 챙겨 먹여 키우는 인간. 스스로 밥을 챙겨 먹지 못하므로 부인이 밥을 챙겨주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 그러나 밥 먹여준 은혜를 전혀 모르고 오히려 밥투정에 바쁘다.

가사노동 : 하루 종일 움직이게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놀고 먹는다고 생각하게 하는 신비한 효과가 있는 중노동. 흔히 사랑의 노동이라고들 하지만 이는 대가가 없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 글들을 읽으면 아마도 웃는 사람 1/4, 화내는 사람 1/4, 웃으면서 공감하는 사람 1/4, 울뚝불뚝 화내면서 욕하는 사람이 1/4 정도가 될 것이다.

이 글들은 페미니스트 잡지에 '상대적이고도 적대적인 페미니스트 백과사전'이란 이름으로 실렸는데, 지금 읽어도 재미있고 공감이 간다.

제 손으로 밥 해 먹을 줄 아는 남자도 진창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지만 그래도 이 지구상에 몇 명쯤 살아있다. 그것이 아주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면 할 일이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꽤 아름답고 훌륭하다.

같은 학교, 같은 학과, 같은 졸업... 그러나 그 부부의 밥은?

인간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제 입으로 들어갈 밥과 반찬은 제 손으로 만들어 먹을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제 입으로 들어가는 밥과 반찬을 스스로 만들지 않고 삼시 세 끼 모두 사먹거나 남의 손을 빌리는 사람들 중엔 여자도 무척 많다. 그러나 여자는 언젠가부터 밥하고 반찬 만드는 일을 배워야 하는 걸로 여겨진다. 반면 남자는 사정이 있는 사람만 배우고 때로 익힌다는 것.

똑같은 학교와 똑같은 학과를 똑같은 날에 졸업하고 결혼을 한 두 부부가 있다. 시험 성적도 거의 비슷하고 논문 주제도 비슷했다.

그러나 결혼을 한 바로 그 순간부터 여자는 밥하고 반찬 해서 남편을 먹여주는 것이 도리가 되었고, 남자는 해주는 밥을 때론 맛있게 때론 투정하며 먹기만 해도 도리를 다 하는 걸로 둔갑했다. 결혼 전에는 같이 사먹고 돌아다녔지만 결혼 후에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똑같은 공부만 똑같은 장소에서 했으므로 요리나 음식 만들기에 완전히 문외한인 것도 똑같았다. 여자도 처음에는 밥도 잘 못하고 수제비나 국수도 끓일 줄 몰랐다. 그러나 요리책을 사서 해보거나 이웃여자들, 친정식구들에게 물어물어가며 열심히 음식 만드는 법을 배웠다.

라면과 커피만 잘 끓이는 학습 능력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여자는 손님 열명 정도가 몰려와도 당황하지 않고 뚝딱뚝딱 상을 차려낼 수 있게 되었지만 남자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라면 끓이기와 커피 타기 정도에 불과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남편은 어쩌다 일요일에 라면을 끓이면서도 '얼마나 맛있게 끓이는가' 자랑스러워 하고, 손님이 왔을 때 남편이 커피잔을 내오면 모두 얼마나 자상하고 부엌일을 잘하는가 찬탄해 마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리도 학습능력이 현저하게 달라질 수 있을까. 거의 모든 일을 여자보다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들이 왜 밥과 반찬 하는 일은 배우지 않는가(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 '일류 요리사나 일류 주방장은 대부분 남자'라고 소리 지른다. So What?). 또 어쩌다가 일품요리 하나라도 하는 날이면 '해준다'거나 '도와준다'고 하면서 생색이 늘어지기 일쑤다.

제 입에 들어가는 밥을 스스로 하지 않는다 해도 남자와 여자는 조금 다르다.

여자들은 거의 매 끼니를 남의 손을 빌려 먹지 않는다. 남편이 해주는 밥을 얻어먹지도 않는다. 어쩌다가 밥을 하더라도, 해주거나 도와주지 않고 그냥 한다. 또한 얻어먹거나 대접받으면 함께 잘 먹고 그 자리에서 설거지라도 꼭 한다(물론 그렇지 않은 여자들도 있다).

생활인 그 남자, 직접 밥을 짓다

남자가 차린 밥상, 아내는 외국으로 일하러 가서 없고 두 아이와 함께 먹고 살기 위해 일상적으로 차리는 밥상이다.
남자가 차린 밥상, 아내는 외국으로 일하러 가서 없고 두 아이와 함께 먹고 살기 위해 일상적으로 차리는 밥상이다. ⓒ 권혁란
일단 아래의 밥과 반찬 일기를 보자.

7월 4일(화)
오후 간식: 오렌지치즈케이크, 양갱, 치즈(안 먹음), 토마토주스(캡 진함).
저녁: 카레밥, 오뎅탕(어제 먹다 남은 것들)·낙지젓갈, 장조림메추리알, 참치샐러드(어제 그대로), 연어스테이크.
디저트: 귤(디따 심), 한참 있다가 호두우유.
7월 15일(토)
점심: 첫째 아이 늦은 생일 겸 송별잔치 12명 두둥!! 김밥 2종, 생피자 2종 사오고, 소고기떡말이, 베이컨떡말이, 오뎅 꼬치, 연어스테이크. 음료: 쿨피스, 토마토주스, 오렌지주스, 물.
디저트: 오렌지, 천도, 그린망고.
오후 간식(5명): 다시 베이컨 떡말이, 빵 몇 가지 썰고, 천도.
7월 17일(월)
저녁: 떡볶이(떡·햄·오뎅·고구마·당근), 대구아가미젓.
디저트: 복숭아.
협찬이 더욱 빛난, 첫째 아이와 단둘만의 화려한 저녁.


위의 음식일기는 한 남자가 자신의 홈피에 쓴 것이다.

요즘 사람들의 홈피를 다니다 보면 웬만한 요리사나 조리사나 주방장은 울고 갈 만한 레시피가 천지다. 또 요리에 관심도 재능도 많은 남자들이 워낙 많아서 가수 이현우나 탤런트 이정섭, 가수 이승철 등의 요리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 세상이다.

그러나 이 음식일지처럼 감동스럽진 않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 요리가 자신의 일인 경우가 태반이고 반쯤은 전문가 수준이므로.

이 음식 일기가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은 그저 생활인이고 남편이고 두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영국으로 일하러 삼년 정도를 예상하고 떠났으며, 두 아이는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다닌다.

주목할 점은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잘 차려먹는다는 게 아니라 마인드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 남자의 머릿속에는 오늘 한 끼 무얼 어떻게 요리해서 아이와 자신이 먹을 지 생각하는 것이 직장일과 같은 비중으로 자리잡고 있다.

"시어머니가 줬다며 친구가 가져온 마늘쫑, 절반은 처가에 절반은 보관"

음식 일지보다 성실하고 섬세한 음식에 대한 생각이나 요리 방법은 다음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읽는 재미도 있거니와 요리법도 배울 겸 읽어보자.

냉장고/찬장 정리
그녀들이 북악에서 손수 캔 어리디 어린 돌나물 : 오늘 아침 엿새 만에 다 먹었다.
초고추장 : 아직 남았고.
시어머니가 보내줬다며 친구가 가져온 마늘쫑 : 반은 처가에 보내고 반은 씻고 다듬어 보관.
깐 마늘 두 통 : 한 통은 곰팡이 슬어서, 거의 안 남은 한통은 싹 나고 쭈글해져서 다 버리고.
묵은 김치 : 푹푹 삶아 찌개재료로 보관. 숙원사업 기어이 해냈다!
역시 친구 시어머니가 보내준 고등어 : 한 마리는 처가 보내고 한 마리 보관. 흰떡 사이 끼우고 소고기로 둘둘 말아 기어코 해먹으리라.
꽝꽝 언 옥돔 네 마리 : 한 마리 뜯어 아침에 첫째아이 죽 끓여주고 남았고, 두 마리를 답례로 보내자.
딸기·방울토마토, 낼 아침까지 다 먹자.
오래된 날고구마 : 찜통도 없이 온갖 원시적인 수단 동원해 일단 쪄놓고.
친구가 준 날치알 : 절반 나눠 처가 집에 보내려는데, 이 친구 초밥용 새우랑 연어 살을 또 보냈구나…. 이건 시집서 보내준 거 아니고 장보러 간 길에 일부러 산 거렸다 ㅠㅠ.

<font color=a77a2>[왼쪽-치즈 떡말이구이 ] 냉동실과 냉장실을 뒤지고 정리해 그때 그때 먹어야 할 것을 장만한다. <font color=a77a2>[오른쪽-돌나물 초고추장 무침] 남녀 손님 네 명을 초대해놓고 급히 초고추장을 만들어 무쳤다.
[왼쪽-치즈 떡말이구이 ] 냉동실과 냉장실을 뒤지고 정리해 그때 그때 먹어야 할 것을 장만한다. [오른쪽-돌나물 초고추장 무침] 남녀 손님 네 명을 초대해놓고 급히 초고추장을 만들어 무쳤다. ⓒ 권혁란
고구마 맛탕
<재료> 고구마, 꿀, 설탕
<만들기>
1. 고구마는 잘 씻어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2. 꿀이랑 설탕 적당량 넣고 찰랑찰랑 물부어
3. 별 거 없다. 그냥 조린다.

소고기 떡구이
<재료> 떡볶이 떡, 베이컨/소고기, 양념고추장, 케첩, 슬라이스치즈, (소도구: 이쑤시개)
<만들기>
1. 떡볶이떡은 새끼손가락 길이 정도로 잘라 해동시킨다.
2-1. 베이컨 말이: 떡을 두개 나란히 겹쳐 베이컨으로 말아 싸고 이쑤시개로 고정
2-2. 소고기말이: 소고기는 얇고 넓게 썰어 준비했다가 떡 너비만큼으로 다듬는다. 역시 떡 두개 나란히 겹쳐, 이번에는 양념고추장을 윗면만 바른 뒤 소고기로 말아 싸고 이쑤시개로 고정(양념고추장은 슈퍼에서 파는 떡볶이용 고추장을 써도 굿).
3. 기름 두르지 않은 팬에 올리고, 한 면 익히고, 뒤집어 마저 익힌다.
4. (소고기만) 한 번 더 뒤집고, 잘게 자른 슬라이스치즈 올리고, 불 끄고, 넓은 종이로 팬 전체 덮고 3~5분 더 둔다(치즈 녹도록).
5. 소고기 말이는 그냥, 베이컨 말이는 케첩과 함께 낸다.


마지 못해 하거나 자랑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그래야 어린 자식과 자신이 잘 먹고 살 수 있다는 적당한 긴장감과 나름대로 쏠쏠한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가.

참으로 근사한 그 남자의 센스

꽃과 촛불. 결혼식장에서 주워온 꽃을 새로 꽂고 그 위에 촛불을 밝혔다. 이 모두 생활인 그 남자가 미리 해놓았다.
꽃과 촛불. 결혼식장에서 주워온 꽃을 새로 꽂고 그 위에 촛불을 밝혔다. 이 모두 생활인 그 남자가 미리 해놓았다. ⓒ 권혁란
그에게 가장 탄복할 일은 홈피의 글에서가 아니라 직접 겪었다. 그는 평소 친구처럼 지내는 남녀 몇 명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초대된 사람들은 남자가 혼자 차린 저녁식사에 초대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만약 상을 잘 차려놓았다면 도우미의 손을 빌렸을 것이고, 아니라면 중국 음식이나 피자 한두 판을 시켜놓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찌개를 끓여놓았고, 나물을 무쳐놓았고, 술안주를 몇 개 만들어놓았다. 식탁에는 꽃을 꽂고 촛불을 밝혀놓았다.

수염이 숭숭 난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부엌과 거실을 오가면서 손수 장만한 음식들을 손님들이 맛있게 먹도록 배려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생전 처음 보는 정경이었다. 음식이 요리사 뺨치게 잘 차려지지 않아서 감동은 더욱 커졌다. 그저 한 끼 맛있게 먹을 정도만 차려놓았기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이후 그는 여자들만 득시글거리는 식사 자리에도 왔는데, 밥을 함께 잘 먹고는 자연스럽게 벌떡 일어나 한 여자와 함께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했다. (밥 차릴 때 자리에 없어서 돕지 못했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이 사람 말고도 어느 날은 혼자 사는 남자 집에서 여러 명이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 남자도 "요즘 달래가 제철이라 한 번 무쳐봤어요"라거나 "요리 사이트 가보니 동치미 담그는 법이 있기에 한 번 담가봤어요" 하는 말을 하면서 반찬과 요리에 대한 관심을 내보였다. 그리고 술마신 후에는 콩나물을 다듬어 해장국으로 끓여놓는 센스를 발휘했다.

보통은 위의 두 남성이 아주 여성적인 성향을 가졌거나 요리에 취미를 가졌다고 생각하겠지만, 딱히 그렇진 않다. 이 사람들은 아주 당연히 자신이 먹을 것은 직접 준비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남을 초대했을 땐 간단하게라도 손수 준비해서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아주 평범한, 그런 남자일 뿐이다.

어머니, 아내, 딸에게서 얻어먹는 밥은 이제 그만

이 길고도 사소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하는 까닭은 이런 기본적인 생각을 갖고 행동하는 남자들이 좀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에서이다.

세상 남자들이 밥과 반찬을 잘 차려 먹고 다닌다고 해서 그 혜택을 내가 받을 일은 만무하다. 여하튼 그렇게 제 밥상 잘 차려먹고 사는 남자들이 이 세상에 잘나고 똑똑한 어떤 남자보다 인간답고 남자답고 멋있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남성은 어려서는 어머니 손에, 좀 더 커서는 아내(아내가 없으면 식당 아줌마나 도우미 아줌마) 손에, 세월이 좀 더 지나면 딸 손에서 만들어진 음식을 먹고 산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여성들이 출장을 떠나거나 먼 외출을 하면서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놓아도 찾아먹지 못하고 끝내 음식점에서 시켜먹는 남자들이 너무나 많다.

내 입으로 들어갈 음식은 만들어 먹을 줄 알아야 제대로 독립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읽은 책 중에 <아버지의 부엌>이란 소설이 있었다. 어머니가 죽고 난 뒤, 하나밖에 없는 딸은 생전 부엌에 얼씬도 안해 본 아버지를 안쓰러워한다. 그러나 이 딸은 아버지 집에 들어가 음식을 만드는 게 아니라, 아버지 혼자서도 음식을 잘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도와준다.

하루종일 늙은 아내에게 밥투정이나 하고, 아내가 외출하면 쫄쫄 굶거나 인스턴트식품으로 때우는 나이든 남자, 스스로도 못 견딜 일일 것이다. 부디 (남녀 불문하고)제 밥은 제가 챙겨먹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글에 언급된 첫번째 남자는 44세이고 두 아이의 아빠이고 직업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글과 사진은 허락을 받고 가져왔으며, 두번째 남자는 38세이고 혼자 살고 있고 출판사에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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