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하늘은 비구름을 잔뜩 품고 있었으나 빗방물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도법스님은 낮은 목소리로 ‘한국전쟁당시 대전지역 우리민족 우리형제 제위 영가시여’로 시작하는 제문을 낭독하였다.

지난 7월 19일 오전 10시 목동 옛 대전형무소터에서는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6.25전쟁 때 학살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추모하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었다.

▲ 중구 목동 대전형무소터 위령제
ⓒ 조병민

순례단과 종교인, 지역 시민사회단체 회원, 일반시민 등 40여명은 좌우이념의 색깔을 걷어내고 한 마음으로 향을 피우고 술을 올렸다.

1950년 7월, 6.25 직후 이승만 정권은 이곳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제주4.3, 여순사건 관련자 등 좌익 사범과 충청도 지역의 보도연맹 가입자 민간인 등 7000여 명을 산내 골령골로 끌고가 비밀리에 처형하였다. 2달 후인 9월에는 인민군이 퇴각하며 군경, 우익세력 민간인 1300여명을 형무소 내 우물 등에서 학살하였다. 대전형무소터는 좌우 이념에 희생된 사람들의 원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 위령탑을 순례하는 참석자들
ⓒ 박현주

도법스님은 “6.25전쟁은 강대국의 이념 대립 속에서 약소국이 희생된 사건이며, 그 분노와 원한의 상처가 전국 곳곳에 남아있는데, 특히 대전은 엄청난 수의 희생자를 낸 지역"이라고 말했다.

또, “이제는 살아있는 사람도 서로 만나는데, 죽은 영혼을 따로따로 추모하는가? 돌아가신 분들을 한민족 우리 형제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함께 추모하는 자리를 만들자”며 위령제 취지를 설명하였다. 참가자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형무소터 위령탑을 몇 바퀴 도는 의식을 한 후, 산내 골령골 학살지로 이동하였다.

▲ 산내 골령골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 박현주

산내 골령골은 인근까지 도시개발이 진행되었고, 옥천으로 이어진 2차선 도로가 나있었다. 그러나 56년 전에는 호랑이가 나올 정도로 험준하고 깊은 산골짜기여서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은 곳이었다. 견고한 제단 위에 높은 위령탑에 세워져 있던 형무소터와는 달리 이곳은 옥수수밭 한켠에 낮은 표지석 만이 쓸쓸하게 서 있었다.

산내는 좌익계열이 희생된 터라 진상규명은 물론이고, 현장 보존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곳 흙더미에 함부로 파묻혔던 유골은 아스팔트에 다시 덮였고 건축물들이 들어서면서 훼손되고 있었다. 특히 2001년도에는 학살터임을 알리는 표지석 바로 옆에 교회가 세워져 유족들조차 마음놓고 추모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도 역시, 교회의 반대로 그 자리에서는 위령제를 지낼 수 없었다. 그래서 2차선 도로를 건너 맞은편 옥수수밭에 천막을 치고 위령제 준비를 하였다.

▲ 반야심경으로 진혼하는 도법스님
ⓒ 박현주

참석자들은 대전형무소터와 같이 향을 피우고, 술을 올리고, 추모의 기도와 절을 올렸다. 도법스님은 예의 ‘한국전쟁당시 대전지역 우리민족 우리형제 제위 영가시여’로 시작하는 제문을 낭독하고, 작은 종을 울리며 반야심경을 독송하였다. 수천 명의 비명을 삼켰을 골짜기 골령골은 말이 없는데, 제를 지내는 내내 커다란 호랑나비 한 마리가 그 시대 억울하게 죽은 자의 넋인 듯 주변을 팔랑거리며 날고 있었다.

▲ 수많은 비명을 삼킨 골령골은 말이 없다
ⓒ 박현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