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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18일 낮 대추리와 도두2리 주민 1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대추리 평화예술공원에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제3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 문만식
지난 겨울 대추 초등학교 솔부엉이 도서관에 겨울 햇살이 한가하게 비춰 들어오는 걸 보면서 이 작은 마을에 무슨 큰 일이 정말 일어나기나 할까, 꿈처럼 모든 소동이 지나갔으면, 그래서 어른들 말씀처럼 그저 ‘올해도 농사짓고, 내년에도 농사짓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랑말랑한 마음을 먹었었다.

대추리 주민으로 살고 있는 평화유랑단 '평화바람'이 '평택 평화촌 프로젝트'라는 것을 제안했고, 빈집은 주민이 되려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찻집, 도서관, 지킴이네 집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던 나는 7살 정혜민과 함께 겨울 끝의 한 달 동안 대추리에 들어와 살았더랬다. 평택을 평화마을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시도였고, 그 바람을 타고 많은 이들이 대추리와 도두리의 주민이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대추리에 둥지를 틀고자 했던 나와 정혜민은 집이 필요했다. 협의 매수를 하고 떠난 주민들의 남겨진 집. 사실은 버려진 집 중 하나를 골라 깨진 유리를 버리고, 바닥을 쓸면서 살 준비를 했다. 또 다른 집에서 버려진 싱크대를 나르고 어떤 집에서 남겨진 책장을 닦아 옷을 담을 장으로 뉘였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데 정작 필요한 것은 물과 전기였다. 그런데 그것을 어찌해야할지…. 정작 생활에 필요한 재능은 없다며 한탄만 하고 있던 나는 마침 회의 때문에 마을을 찾았던 그를 붙잡았다. 평소에도 웬만한 건 다 고칠 수 있다고 으스대던 박래군은 면장갑을 끼고, 모터를 끼우고 전기를 연결했다.

모터가 얼어버린 지하수를 빨아들이지 못해 첫날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주말에 혼자 찾아와 모터를 고쳤다. 그리고 대추리 맥가이버 신종원씨, 신년을 노동으로 시작하겠다고 달려온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노력한 끝에 나와 정혜민의 조그만 집에 전기와 물이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흔하고 흔했던 전기가 반짝하고 들어오던 순간. 박래군은 예의 까만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깡충깡충 뛰면서 즐거워했다.

"야 전기 들어온다, 들어왔어"

대추리 작은 집은 처음 빛을 보고, 물을 만난 듯한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소란스러워졌다. 그때 박래군과 나, 다른 사람들은 파괴된 것을 새롭게 부활시킨 자신들의 정성을 참으로 기특해했다.

모터로 물을 길어 올려 보일러를 돌리고, 마침내 따뜻해진 방에서 조촐한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박래군과 사람들은 대추리라는 마을이 우리에게 준, 작은 선물을 기억했다. 그것은 파괴하는 이들보다 우리가 한발 앞서 있다는 것. 못쓰고 버려진 것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는 과정을 보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기쁨을 얻을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가야할 땅 대추리와 도두리

▲ 지난 4월 미군기지 확장이전 반대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박래군 인권활동가(맨 우측)
ⓒ 이철후
"황새울 들녘에 지는 노을이 왜 가슴 아픈지 아. 여기는 역사가 있어. 일정 때, 미군정 때 두 번이나 마을을 빼앗긴 농민들이 갯벌을 일궈서 지금 같은 농토를 만들었지. 그때 무슨 기계가 있었겠어. 모두 다 사람의 단단한 힘으로 만들어낸 거야. 그런데 이렇게 쓸 만한 땅이 되니까 갑자기 주인이라는 작자들이 나타난 거지. 그리고 주인 행세를 했어. 그러니 수로에 아이를 잃고, 먹던 밥숟가락도 못 놓고 집에서 쫓겨난 농민들의 설움이 얼마나 깊었겠니. 나도 농민의 자식이라서 잘 알아. 땅이 어떤 건지 잘 알아. 안성천이 얼마나 가까우냐. 이게 다 바다였다니까. 그동안 국가가 이 사람들한테 해 준 건 아무 것도 없었어."

3월초, 땅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황새울 들녘에 불길을 놓던 인권활동가들을 따라다니며 그는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형 그거 책에서 읽어서 나도 다 알아”라는 후배들의 핀잔도 아랑곳하지 않던 그는 그때부터 대추리 도두리 병에 걸려있었다.

국가가 책임져주지 않은 세월동안 묵묵하게 살아온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의 아픔을 아는 후배들 역시 그와 같은 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우리 모두에게 2006년은 그랬다. 대추리와 도두리 땅을 밟아 본 이들 모두는 이미 본 것을 아는 것을, 보지 않았고 알지 못한다고 하지 못하는 그 병에 걸려 있었다.

자기가 살던 땅에서 자기가 살던 방식대로 살다가 죽기를 원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외면할 수 없어 생긴 병. 그 병을 박래군과 사람들은 지독하게 앓게 된 것이었다.

지난 3월 15일 황새울 들판을 파헤치는 포크레인 위에서 맨몸으로 저항하다가 연행되어 구속되었던 박래군을 보았던 사람들은 그의 살아온 방식에 비로소 많은 존경을 보였다. 그 연배의 친구들이 국회에서, 정부 요직에서 대추리 주민들을 향해 국가의 근엄을 이야기할 때, 진흙 뻘을 구르며 국가가 아닌, 인간의 존엄을 외친 그에게 사람들은 새롭게 눈을 돌렸다.

그래서 그를 빌어 국제사회조차 평택 주민들에게 관심을 돌렸고, 사람들은 주민들의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접하기도 했다. 박래군 석방운동을 펼치던 사람들은 인권옹호활동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평화로웠던 285리의 길

▲ 지난 2004년 8월, 경기도 평택시 안정리 미군 K-6기지(캠프 험프리스) 앞에서 열린 미군기지확장반대 집회에서 대회사를 하고 있는 김지태 팽성대책위 위원장.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래서 떠난 걸음이었다. 대추초등학교가 부숴 지고, 황새울 벌판에 철조망이 쳐지고,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망연자실한 주민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은 간절함 때문에 떠난 행진. 평화적 생존권이란 화두를 보다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우리의 방식대로 해보자하면서 떠난 걸음이었다.

285리의 길이 가깝다 할 사람 아무도 없었고, 묵묵히 걷다보면 이 사람도 붙고 저 사람도 붙고 그래서 경찰들이 첩첩이 쌓아둔 불심 검문의 벽도 뚫고 갈 수 있겠거니…. 한편으로는 너무나 안이하게 걷기만 작정한 그런 걸음이었다.

이렇다 할 큰 단체에서 수 십 명 박아준 것도 아닌데 알음알음 알고 온 한 두 명이 한 낮에는 이 백 명도 되고, 자리 펴고 누운 밤에는 육십 명도 더 넘게 함께 잠든 그런 행진이었다. 평화가 무언지 형형색색의 꿈들을 꾸고 있었지만 이렇게 걸어서 대추리만 들어가면 우리 고단함이 무어가 그리 대순가 생각했던 걸음이었다.

평화가 무엇인지,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지, 서로의 생각이 달라 새벽 늦은 시간까지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며 작은 울타리의 민주주의를 경험했던 행진. 그 행진의 끝에 박래군이 또 연행되고 구속되었다.

술 취한 안정리 상인들의 각목 앞에서 행진단을 보호해주지 않았던 경찰, 경찰서 앞의 항의시위에 무자비한 폭력으로 대응한 경찰들에 의해 끌려갔다. 그리고 다시 구치소의 어둑한 어느 방에서 밀린 피곤과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걱정으로 밤을 새우고 있을 것이다.

‘그 너른 들판을 사시겠다고? 그 금액은 너무 어마어마해서 (아니 너무 작고 볼품이 없어서) 나는 상상을 못할 지경이니깐. 힌트를 드리자면 대추리, 도두리 들판에서 지금껏 거두었던 벼의 낱알의 개수만 하다고나 할까. 그것을 일구기 위해 굽혔다 폈던 관절의 운동 횟수만 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한 가지 더. 그들의 시간, 한숨, 울음, 웃음 그것을 내려다보았을 별빛이나 시름을 달래주던 바람의 총량까지 합하면 대충은 나올 것 같다던 김지태 이장의 일갈을 기억하는가.

인간의 존엄, 생명이 나는 땅이 돈으로 해결된다고 믿는 이들은 잘 모른다. 제국주의 군대가 퍼부어 주는 공포를 토대로 한 안보에 기대어 사는 이들은 알지 못한다. 국책 사업의 깃발만 꽂으면 안 되는 게 없었다고 믿는 국가주의자들은 알지 못한다. 평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은 박래군이나 김지태가 꿈꾸는 삶이 무언지 잘 모른다.

못쓰게 버려진 전구 하나가 온 들판을 번득이는 번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가난하지만 자기가 살던 대로 사는 게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들의 진심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박래군은, 또는 김지태는, 또는 그 뒤를 따를 무수한 양심들은 앞으로 계속 감옥으로 가게 될 거다. 아마도 감옥에 갇힌 양심의 수를 세는 것이 황새울에 부는 바람의 총량을 합하는 것처럼 어려워 질 때까지 사람들은 감옥으로, 감옥으로 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박진 기자는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입니다.

박래군의 구속적부심은 20일 오후 2시 수원지방법원에서 있을 예정이다.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은 이런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탄원서

재판장님께. 

박래군이 구속됐다니 서글플 따름입니다. 어떻든 미군에게 기지를 지어주려는 정부의 외골수를 수차례 보고 겪으면서 분노도 당혹감도 무뎌졌나 봅니다. 다만 한 사람의 갇힘이, 그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할 그를 아는 여럿의 슬픔이 전해와 서글프고 또 속상합니다. 
  
브레히트의 <민주적인 판사>란 시를 떠올립니다. 아는 영어라고는 '1492년' 밖에 없는, 그래서 번번이 미국 시민권을 얻지 못하는 이민자에게 그의 처지를 알게 된 판사가 마침내 "미국이 독립한 해는?"이란 질문을 합니다. 재판장님은 박래군에게 무엇을 물을 생각입니까? 
 
몇 차례나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도 시민 대접을 받지 못하는 대추리, 도두리 마을 사람들에게 정부는 끊임없이 "얼마를 보상받고 싶냐?"고만 묻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라고 물어봐도 "왜 법을 지키지 않냐?"는 질문만 되돌아옵니다. 
  
묻는 말에만 답하라는 현실은 힘없는 사람을 더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함께 질문도 하고, 답도 함께 찾기 위해 시작된 평화행진이었습니다. 어쩌면 '평화'를 앞에 건 행진이었기에 단장을 맡은 그가 그처럼 쉽게 연행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검찰은 준비된 폭력, 계획된 불법인양 말합니다. 이미 정치인들에게는 훈장이 되어버린 민주화 운동 경력까지 끄집어와 그의 죄질을 논합니다. 
 
'증거인멸'과 '도주우려'가 아니라 다시 평택으로 달려가 정부가 잘못한 증거를 마저 찾아낼까 염려되어 가두려함에도 짐짓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질이 나쁜 것은 박래군이 범했다는 죄가 아니라 정부의 정책입니다. 그럼에도 정의로움을 가두어 잘못을 감추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분노보다, 슬픔보다 더 한 부끄러움이 되풀이되지 않길, 그가 하루라도 빨리 석방되어 가족과 동료의 곁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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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www.right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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