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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정하수는 수더분하고도 촌스럽게 생긴 사람이다.
ⓒ 정학윤
경북 청도 수월리에 있는 화가 정하수(56)의 집을 지난 17일 방문했다. 그는 노동자출신의 화가로서 대구에서 맹렬히 활동했던 인물이다.

댐 건설 예정지 골짜기를 지나서 야트막한 비탈에 있는 그의 집은 딱히 볼만한 뭔가를 이웃하여 위치한 것도 아니다. 더구나 명색이 화가의 집이거늘 그럴싸한 조형물 하나 없는 꼴인데다가, 그나마 20여평 남짓 마당에는 벌들이 붕붕 날고 벌통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1989년 즈음 '대구민중문화운동연합' 대표와 '민족민주예술운동연합 건설준비위' 공동대표였던 그는 대형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사건으로 화가 홍성담 등과 함께 연루되어 안기부에서 고문을 당하고 징역을 살고 나왔다. (<민족해방운동사>는 당시 각 대학을 순회하여 전시되다가 평양 축전에 슬라이드로 촬영되어 통일에 대한 열망을 담아서 보내진 그림이다. 아래 설명 참조)

그는 징역을 살고 나온 이후부터 현재까지 경북 청도에서 그림을 구상하며 벌을 치고 살아가고 있다. 사실 그리 애틋한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래 전부터 그의 산골생활이 궁금했다.

드러내지 않고 숨어버릴수록 더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자신을 내던져 불의와 싸우며 자신 외의 것을 이루고자 했던 그 많던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지난했던 싸움의 추억과 자신의 현재를 어떻게 결산하고 있는 것일까?

▲ 작업실 구석에 놓인 정하수의 자화상.
ⓒ 정학윤
▲ 조각상.
ⓒ 정학윤
"안녕하십니꺼?"

10여 년이 훨씬 더 지난 후의 만남이다.

"아! 얼굴을 보니깐 기억이 나네."

개량한복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러닝셔츠 차림에다 낡은 수건을 두른 그의 일성이었다.

"여기서 뭐합니꺼?"
"뭐 하기는? 도망 와서 잘 살고 있지."


반가움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불쑥 던진 머쓱한 물음에, 그가 뜬금없는 답변으로 되돌려 주기를 '도망 중'이라고 했다.

▲ 들밥.
ⓒ 정학윤
▲ 마당에 놓인 벌통.
ⓒ 정학윤
거실에 들어서서야 이전의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구식 선풍기 뒤에 놓인 자화상, 반쯤 접힌 채 붙어 있는 판화들, 약간 쓸 만하게 보이는 벽난로, 꿀을 모아 둔 드럼통, 꿀을 담는 박스와 꿀단지가 얼기설기 같이 놓여 있다.

노동자 출신의 화가인 그는 여전히 생활의 현장과 그림 그리는 작업실을 따로 분리해 두고 있지 않았다.

"벌통 옆에서 소리를 내면 경계하는 벌들이 날아드는데…." 마당의 벌통 옆으로 옮겨서 대화를 시작하는 즈음에 그가 알려주었다. 벌통을 호위하는 경계벌이 있는데, 그 옆에서 소란을 떨면 벌들이 꿀을 훔치러 온 줄 알고 모여든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러 여기에 왔는데, 요즘은 벌만 치고 있어."
"돈 많이 버슈? 인터넷을 통해 판매한다든지 그러면 될 텐데."
"벌기는 뭘. 나야 원래 돈 잘 쓰는 것을 못해봤으니 먹고 살면 만족이야. 인터넷의 '인'자도 모르고, (꿀은) 알음알음으로 팔고 있어. 그것만 하면 돼. 여기 참 좋다. 신문도 보지 않고, TV도 보지 않고…. 그러나 안본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어찌 모르겠노?"


▲ 그의 작품 <들밥>.
ⓒ 정학윤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이 생산하는 벌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했다. 미네랄이 어쩌고, 생명이 어쩌고 했지만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다만 꿀에서 불필요한 수분을 증발시키고 잘 숙성시켜서 거짓 없고 자신이 만족하는 꿀을 출하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또 자신에게 꿀을 제공하는 벌을 온전한 생명체로 대우하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하기야, 그 인간 본성이 어디에 갈 리가 있겠는가.

"'들밥'이라? 거 꿀의 상표로는 그만이네요. 꿀이 들에서 나는 밥이 맞지."

그렇게 멋대로 내가 해석을 붙여서 말을 이어갔다. 벌을 치고 꿀을 생산하여 판매한 지는 벌써 몇 해가 지났는데, 작년 말에서나 자신이 생산한 꿀의 이름을 '들밥'으로 결정했단다.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고 '들밥'은 원래 내 작품이름이야. 일하면서 먹는 새참을 들밥이라고 한 건데…."

작품 <들밥>을 그가 생산하는 꿀의 상표로 정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서 그렇게나 많이 봐 왔던 그 판화의 제목이 <들밥>이었다. 아마 그가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를 위해 써먹기는 처음일 거다. (그런데 상표를 찍을 때 전화번호라도 넣어둘 것이지…. 그것은 왜 빼 먹누?)

▲ 그의 작업실 벽에 반은 떨어져서 붙어 있는 그림들. 반은 이전에 보낸 그의 시간들에 매달려 있고 접힌 반에서 또 다른 자신을 열고 있는 그를 보는 듯 하다.
ⓒ 정학윤
"난 이렇게 하수(下手)로 살고 있어. 이름이 '정하수'니깐 하수로 사는 것이 당연하지. 껄껄껄."

그는 치열했던 싸움의 현장에서 자신을 내던져 온몸으로 저항하며 지나왔고, 현재는 도망(?)와서 없는 듯 살고 있는 자신을 그렇게 결산했다. '도망'이라 함은 자신의 입장에서 보는 것인데, 여전히 불합리한 세상이 방치되는 것에 대한 공범의식을 가진다는 뜻일 게다.

그게 뭐라고…, 그 골짜기에서도 여전히 그런 것을 지고 있는지. 하기야 어찌 정하수만이 자신의 현재를 '도망 중'으로 표현하겠는가? 그와 함께 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원죄의식과 서걱거림으로 살아가고 있을 터.

생존하기 위해서 안 해본 노동이라고는 없는 노동자, 운동단체 유인물의 밑그림을 기꺼이 제공하던 돈 안 되는 노동자 출신의 화가. 고문과 투옥,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할을 축소하여 거짓 없는 농사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농사꾼 정하수.

▲ <들밥>.
ⓒ 정학윤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울 때가 있어. 고문의 후유증으로 대인기피증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상처투성이로 살고 있기도 하다.

세상의 약삭빠름과는 단절한 채, 살아가고 있는 화가 정하수. 그가 여전히 자신만이라도 정결하게 보듬고 있는 증거로 어설픈 '하수(下手)'를 빙자하여 살고 있는 것에 대하여, 도망쳐 있는 것에 대하여, 그 인간뿐 아니라 그런 인간군상들이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서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느껴야 할 바는 무엇일까?

"그림은 언제 그릴 거유?"

그가 산골에 든 이후로 계속 받던 질문일 거다.

"그려야 하는데, 아랫마을이 수몰되기 전에 그것을 그려야 하고, 나와 같이 사는 벌들도 그려야 하고, 그려야 하는데 말이야…."

'걸개그림'과 <민족해방도>에 대하여

[걸개그림] 벽에 걸 수 있는 그림이라는 뜻. 민화나 불화에서 비롯된 것으로써 불교의 괘불화에서 어원을 빌어와서 '괘화'라고도 한다. 1980년대 초에 대중집회장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이후 다양한 형태로 제작된다. 걸개그림은 집회의 성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아주 사실적이며 선동적인 의미를 갖는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더욱 더 보편화되면서 지금은 어느 집회장에서나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집단 창작이 대부분이어서 예술적 가치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점차 전문집단의 참여로서 질적인 정교함을 더해가고 있는 민중미술의 한 형태이다.

[민족해방사(도)] 민족미술운동연합 6개 지역의 미술단체와 학생미술운동연합 산하 30개 대학미술패가 연대하여 제작한 대형 걸개그림으로 전체 크키는 11폭으로 77m x 2.6m에 이른다. 또한 각 폭마다 제작하는 미술패가 거주하는 지역의 역사적 경험들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는데, 전체 내용은 갑오농민전쟁부터 88년 말의 통일운동에 이르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다루었다. (출처 - 기획창작공간 산방)

"1988년부터 서울, 전주, 대구, 부산, 광주 등 5개 지역에서 갑오경장으로부터 현재의 조국통일 운동기까지의 민중운동과정을 묘사한 <민족해방운동사>라는 대형걸개그림 11컷을 나누어 만든 뒤, 이를 슬라이드필름에 담아 1989년 6월 미국 로스엔젤레스 '민족학교'를 통해 평양축전 축하작품으로 북한에 보낸 혐의'로 홍성담씨를 구속. 이 그림은 5개 지역 민족민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 회원 30여명이 분담해 제작한 것으로 밝혀져 공동제작에 가담한 화가 차일환, 정하수, 백운일, 전승일씨 등이 연달아 구속됨. (출처 - 한국기독교교육협의회)

덧붙이는 글 |  걸개그림 보러가기 클릭(하단부에 민족해방도의 일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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