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비에 젖어 뽀얀 산길이 낯설기만 합니다.
비에 젖어 뽀얀 산길이 낯설기만 합니다. ⓒ 김선호
지난 일요일(16일) 비옷 입힌 아이들을 앞장 세워 닫힌 공간을 나와 빗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샌들 신고, 첨벙거리며 물웅덩이를 몇 개나 지났습니다. 다행히 우리동네는 물웅덩이가 이곳저곳에 생겼을 뿐, 심각한 수해현장은 없어 보였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천마산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우중산행(雨中山行)입니다. 맑은 날의 산행과는 사뭇 그 분위기가 다릅니다. 심각한 수해 현장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으나, 실제로 눈앞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계곡을 마주하니 사태가 자못 심각해 보였습니다.

호우로 불어난 같은 자리의 계곡.
호우로 불어난 같은 자리의 계곡. ⓒ 김선호
늘 사람들로 북적이던 주차장이 오늘은 한가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미 폭우에 젖은 산은 거대한 수분덩어리에 둘러싸여 있고,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더 이상 수분을 흡수하지 못하는 나무는 내리는 비를 속수무책으로 맞고 있습니다.

범람하기 일보직전의 계곡물은 흙탕물임에도 불구하고 허옇게 부서져 내리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빗물이 빠르게 흘러내리는 까닭입니다.

곳곳에 불어난 계곡물로 때아닌 장관을 연출합니다. 발 한쪽 잘못 디뎠다간 그대로 저 물에 휩쓸려 버릴 것 같습니다. 자못 위력적인 물줄기 앞에 오금이 저려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작은 존재입니다. 자연의 위력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물길로 산길이 막혀 구름다리를 건너 돌아가야 했지요.
물길로 산길이 막혀 구름다리를 건너 돌아가야 했지요. ⓒ 김선호
늘 지나가던 길목으로 넘친 물이 길을 막아서니 구름다리를 건너 반대편 길로 향합니다. 중간정도를 건너갔을 무렵일까요, 구름다리가 흔들릴 듯한 굉음이 아래쪽에서 들려 옵니다. 구름다리 아래로 숲이 무성했습니다. 그 사이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계곡이 숨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평소 무성한 숲에 가려져 모르고 있었던 계곡입니다. 대포가 구른들 그렇게 큰 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우레와 같은 폭포수에 깜짝 놀라 구름다리 위에서 발길을 멈춥니다. 거대한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수를 보는 순간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아납니다.

산길 위로 범람한 계곡물 줄기가 자못 위력적입니다.
산길 위로 범람한 계곡물 줄기가 자못 위력적입니다. ⓒ 김선호
약수터가 가까워지고, 본격적인 가파름이 시작되는 5부 능선 즈음엔 아예 길이 없어지고 맙니다. 계곡 주변의 물길이 넘쳐 산길을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수없이 많은 물줄기가 산길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물길이 없는 곳은 토사가 쌓여 느닷없는 늪지대를 형성했습니다. 잘못 발을 디뎠다가 낭패를 보기를 몇 번, 주위를 살피니 나무를 잘라내고 시설물을 세워둔 곳들이 대부분 입니다. 야영장이며 쉼터 주변, 그리고 운동기구를 설치해 놓은 소규모 공원이 자리한 주변에 토사가 쌓여 있었습니다.

산사태의 원리가 그와 같겠지요. 이왕에 있던 산을 깎아내고, 건물을 설치하면 당연히 지반이 약해질 수밖에요. 약해진 지반위로 빗물이 흘러들면 지대가 흔들리면서 산사태가 일어나는 이 간단한 이치를 모를 리 없건만, 해마다 산사태가 늘어만 간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빗속에 잠긴 세상을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폭우에 젖은 산 속을 보게 된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한마디로 "무섭다"고 했습니다. 자연의 위력이 그토록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상상도 못해 보았다고 합니다.

산길인지 물길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산길인지 물길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 김선호
쉬지 않고 비가 내리고, 계곡은 그 빗물로 폭포수를 이루고,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계곡물이 흐르는 산 속을 오르는 일은 얼마간의 모험심을 요구했습니다.

샌들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며 아이들은 조금씩 비오는 숲에 익숙해 갔습니다. 일찌감치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산행객을 서넛 만날 때마다 아이들은 다른 때보다 더 명랑한 인사를 건넸습니다. 고즈넉하다 못해 깊은 적요 속에 잠긴 산에서 사람을 만나니 평소보다 반가웠던 모양입니다.

그 분들은 대답대신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지를 물어왔습니다. 계곡물이 범람하여 산길까지 물길에 휩싸인 숲은 지금 비상시국인 것이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초등학교 아이 둘을 데리고 가는 아줌마가 그들 눈에 불안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걱정 마시라, 깔딱고개만 다녀오겠다"라며 "그마저도 못 가고 중간에 되돌아 올 수도 있다"고 대답하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초면이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걱정을 나누는 이들의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 옵니다.

계곡길이 끝나고 깔딱고개로 향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은 숫제 작은 계곡을 연상케 합니다. 돌아갈까 생각하다 조금만 더 오르기로 합니다.

퐁퐁 한방울씩 솟아나던 옹달샘도 주체할 수 없이 물이 넘쳐납니다.
퐁퐁 한방울씩 솟아나던 옹달샘도 주체할 수 없이 물이 넘쳐납니다. ⓒ 김선호
깔딱고개 향하는 그 길 중간에 작은 옹달샘이 하나 있습니다. 한 방울씩 퐁퐁 물방울이 솟아 나와 여름엔 차고 겨울에 미지근한 물로 오가는 이들의 목을 축여주던 샘입니다. 이 옹달샘도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빗줄기에 그대로 노출된 채 쉼 없이 물을 흘려 보내는 중입니다. 신기한 것은 옹달샘에서 넘쳐흐르는 물은 주변의 물보다 훨씬 차갑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지 모를 물줄기는 샘이고, 계곡이고 구분이 없어 보이는데도 그렇습니다.

마침내 깔딱고개를 바로 앞에 두고 계단길 입니다. 아이들이 올라가기엔 간격이 다소 높은 계단입니다. 그러나 계단에 고무타일이 깔려있어 안전해 보입니다. 그 고무타일이 세로줄과 가로줄이 서로 엇갈려 있었나 봅니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참으로 엉뚱하지요. 세로줄로 내리는 빗방울과 가로줄에 내리는 빗방울이 저마다 다른 모양이라며 신기해 합니다.

'통'하고 떨어진 빗방울이 고무타일의 파여진 홈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마치 수영선수들의 시합이라도 보는 양 재미난 표정들입니다. 비가 오는 날의 산행이라서 별 희한 것이 구경거리가 되어줍니다.

깔딱고개 주변엔 가지런히 띠풀들이 머리를 수그리고 있습니다. 그 사이로 나리꽃도 보이고 푸른색 달개비도 간간이 눈에 띄네요. 모두들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빗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름대로의 지혜 아니겠는지요. 대자연의 질서 앞에서 한발 물러서는 지혜, 그걸 우리가 알고 있다면 해마다 되풀이되는 고질적인 장마피해로부터 얼마간은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여전히 비가 내립니다. 태양이 그립습니다. '해야 해야 잠꾸러기 해야, 이제 그만 나오렴. 김칫국에 밥 말아 먹고 이제 그만 나오렴….' 천둥벌거숭이 아이들이 해를 부르는 노래가 갑자기 듣고 싶어집니다.

인근의 산에서 쏟아져 나온 물로 거대한 강줄기를 이룬 수동계곡.
인근의 산에서 쏟아져 나온 물로 거대한 강줄기를 이룬 수동계곡. ⓒ 김선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