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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모습.
최근의 모습. ⓒ 김현
"아빠, 우리도 이제 텔레비전 있으면 좋겠다."

아들 녀석이 무릎 위에 턱 올라앉더니 은근한 말투로 텔레비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냅니다. 그런 아들 녀석의 볼에 입맞춤을 해주며 물었습니다.

"텔레비전 있으면 뭐가 좋을 것 같은데?"
"응, 만화도 보고 어린이 방송도 듣고… 그리고, 없으니까 심심해요."
"아빠도 가끔 심심하고 그래. 그런데 텔레비전 없으니까 아빠는 더 좋은 게 많은 것 같은데. 누나랑 우리 아들이랑 엄마랑 노는 시간도 많아지고. 음, 책도 많이 보고. 아들은 안 그래?"
"그렇긴 해요. 하지만 심심할 땐, 텔레비전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걸."

집에서 텔레비전을 없앤 지 2년이 다 되어갑니다. 텔레비전을 없애고 나서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은 가끔 텔레비전을 찾지만 딸아이는 거의 찾지 않습니다. 아들 녀석은 이따금 친구 집에서 예전에 즐겨 보던 어린이 드라마를 보고 와서는 텔레비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합니다.

텔레비전을 시도 때도 없이 보던 내가 텔레비전을 버리겠다는 결심을 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둘째치더라도 우선 내 자신부터 텔레비전 없이 지낼 수 있을지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족회의를 열고 텔레비전을 치우기로 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책장을 놓고 책을 꽂아 두었습니다.

생활에서 책이 가까운 곳에 있을 때 아이들은 책을 봅니다. 쉽게 보고 접할 수 있는 곳에 책을 놓아보세요.
생활에서 책이 가까운 곳에 있을 때 아이들은 책을 봅니다. 쉽게 보고 접할 수 있는 곳에 책을 놓아보세요. ⓒ 김현
텔레비전을 버리고 그 자리에 책장을 놓자 리모컨을 잡던 손은 대신 책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엔 아이들이 학교에서 오거나, 내가 퇴근하면 리모컨을 잡고 채널을 습관적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그 습관을 하루아침에 없애려니 아이들이나 저나 손에 몸살이 날 지경이었지요. 그래도 이왕 마음먹었으니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 아들 녀석의 투정과 내 손의 유혹을, 굳은 마음먹고 견뎌내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텔레비전을 치우는 데 성공하려면 처음 한 달이 매우 중요합니다. 담배를 오랫동안 피우던 사람이 갑자기 끊으면 금단현상이 생기듯 텔레비전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 현상은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텔레비전을 없앨 당시 아들 녀석은 <이누야사> <니안다> 같은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밖에 나갔다가도 방송 시간만 되면 텔레비전을 봐야 한다며 안절부절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텔레비전을 없앤다는 데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지만 아이들을 잘 설득해 치우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한 쪽에 치워놓고 필요할 때만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곧 그런 마음을 접었습니다. 있으면 언젠간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 보려면 텔레비전이 아예 보이지 않도록 집안에서 치워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유혹이 있어도, 아이들이 아무리 원해도 뿌리쳐야 합니다. 그렇게 한 달만 넘기면 됩니다. 그 한 달만 무사히 넘기면 금단 현상은 대부분 치유되고 아이들도 텔레비전을 거의 찾지 않게 됩니다.

텔레비전을 치운 후의 변화

처음 텔레비전을 없앤 후 다음과 같은 말이 가장 많이 들려왔다. "애들 텔레비전 안 보면 '왕따' 돼요. 학교에서 하는 이야기가 텔레비전 이야기인데 할 말이 없잖아요. '왕따' 되면 어떡하려고요." 한편으론 염려도 됐지만 다행히 텔레비전 안 본다고 해서 '왕따'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 보던 시간에, 이젠 책을 봅니다.
텔레비전 보던 시간에, 이젠 책을 봅니다. ⓒ 김현
대신 아이들이 책을 접하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방의 책장에 책을 꽂아 놓았을 땐 아빠와 엄마의 잔소리를 들어야 책을 보던 아이들이, 책장을 거실로 끄집어 낸 후론 심심하면 책을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텔레비전이 없으니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책을 읽는 일 정도입니다.

책과 놀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지게 되고 많이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책을 읽을 땐 엄마와 아빠도 함께 읽습니다. 예전엔 아이들에겐 책을 읽으라 하고 어른들은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아이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지만 이젠 그럴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아이들과 노는 시간도 많아졌습니다. 심심하면 아들 녀석과 침대에서 뒹굴며 일종의 레슬링을 합니다. 아들 녀석과 놀고 있으면 딸아이도 슬쩍 끼어듭니다. 그러면 일 대 이의 경기가 됩니다. 그렇게 몸으로 부딪치고 뒹굴다 보면 아이들과의 유대감도 훨씬 강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놀고 난 후 아들 녀석의 표정에는 득의만만함이 가득 차 있습니다. 아빠와 겨뤄서 이겼다는 기분(보통 아들 녀석에게 져줍니다)도 기분이지만 땀 흘리며 살을 맞댔다는 기쁨이 더 마음에 다가오기 때문일 겁니다.

한번은 딸아이가 '우리 집엔 텔레비전이 없다'란 제목으로 일기를 써갔습니다. 그런데 딸아이는 집에 돌아와, 선생님께서 자신의 소망도 텔레비전을 없애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아이의 일기를 반 친구들에게 읽어주며 칭찬해주셨다고 자랑한 적이 있습니다. 딸아이는 그 일기에서 이젠 텔레비전이 생각나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다고 적었습니다.

텔레비전, 필요하지만 한번쯤은 치워도

텔레비전은 우리 생활에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은 아니라고 봅니다. 처음에 치우기는 어렵지만, 텔레비전도 눈에서 사라지면 잊힙니다. 그러면 새로운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텔레비전을 없앤다고 해서 아이들이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잘 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책을 읽는 건 좋아하지만 학교 공부는 별로 좋아하질 않습니다. 가끔 아이들에게 "공부하자"고 이야기하면 "싫어요"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아이들은 한 마디 덧붙입니다. "공부 안하고 책 읽을래요." 그러고 나서 쪼르르 책장으로 달려가 책을 뽑아 오지요. 그러면 절반은 성공했다는 생각으로 그냥 내버려 둡니다. 다만 '독서 편식'을 막기 위해 골고루 읽도록 지도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연개소문>이 재밌다는데… <주몽>도 보고 싶은데…"하며 은근히 아빠를 유혹합니다. 어쩌면 아이들보다 어른인 내가 더 보고 싶은 것들이지만 꾹 참고 있습니다. 일시적 즐거움 대신, 지속되는 행복(?)을 얻고 싶어서입니다. 텔레비전을 없앤다고 행복해질지는 의문이지만요. 그래도 한 번쯤은 치워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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