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관악산 정상인 봉우리는 죽순이 솟아오른 듯한 모양을 한 기암절벽이 있는데, 그 위에 석축을 쌓고 자리잡은 암자가 연주대이다.
관악산 정상인 봉우리는 죽순이 솟아오른 듯한 모양을 한 기암절벽이 있는데, 그 위에 석축을 쌓고 자리잡은 암자가 연주대이다. ⓒ 서종규
지난 8일 오후 '한미FTA 반대 집회'를 마치고 귀향해야 하는데, 모처럼 서울에 볼 일이 있어서 남게 되었다. 돌아가는 최 선생이 인사말을 건넨다. 내일 시간이 나면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막걸리나 한 사발 마시고 내려오라는 것이다.

사진기 하나만 들고 관악산을 찾아 나섰다. 9일 오전 10시, 서울대학교로 들어가 기숙사 위에서 오르는 길을 택하였다. 관악산 연주대를 오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전철 안에서 귀뜸을 받았기 때문이다.

태풍 전야라고 했던가? 제주도를 비롯해 남해안 지역에는 제3호 태풍 '에위니아'의 영향으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데, 이 곳 서울의 날씨는 쨍쨍한 햇살만 가득했다. 그날 하루는 정말 무더웠다. 가파르게 올라가는 발걸음에 금방 쏟아지는 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서울시소방방재본부에서 곳곳에 세워놓은 안내판은 'K76 승천거북전망대' 등 충실하게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K77 해태상을 지나자 헬기장이 나타났다. 간밤에 잠을 설쳐서 그랬는지 몸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서울 한 복판을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서울 한 복판을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 왔다. ⓒ 서종규
바로 이 승천거북전망대 능선을 올라 내려다보니 서울이 다 보였다. 서울대 부근과 관악구 등은 아래에서부터 다 보였지만 이 곳 능선에서는 서울의 모든 모습들이 한 눈에 들어 왔다.

멀리 남산타위도 보였다. 그리고 더 너머 북한산도 보였다. 수없이 솟아있는 빌딩숲이 한 눈에 들어 왔다.

가장 신선하게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역시 한강이었다. 수없이 많이 가로지르는 한강다리가 눈에 거슬렸지만 서울 한 복판을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의 모습은 의연했다.

관악산 정상에 오르는 길
관악산 정상에 오르는 길 ⓒ 서종규
사람들이 헬기장 주변에 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모두 입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있었다. '세상에 등산하는 사람들이 이곳까지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오다니' 하며 감탄하는 순간에 "아이스께끼~ 얼음과자"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떤 사람이 관악산 능선에 아이스크림 통을 짊어지고 올라와 등산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는 것이다. 통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들어 있었는데, 모두 1000원씩 받고 있었다.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맛이 신선했다. 그 무더웠던 날씨가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보통 ‘악(岳)’ 자가 붙은 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다.
보통 ‘악(岳)’ 자가 붙은 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다. ⓒ 서종규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능선을 타고 올라 봉우리를 세 개를 지나야 정상인 연주대에 오를 수 있었다. 헬기장에서부터 오르는 길에 바위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보통 '악(岳)'자가 붙은 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다.

헬기장까지 그런 대로 수월하게 올랐던 생각이 잘못이었다. 바위를 타고 오르는 길이 보통이 아니었다. 기암괴석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바위가 많다 보니 기이하게 생긴 바위들이 많은 것은 사실인 것이다.

꼭 우리나라 지도와 비슷한 모양을 한 '지도바위'가 능선에 있었다.
꼭 우리나라 지도와 비슷한 모양을 한 '지도바위'가 능선에 있었다. ⓒ 서종규
지도모양을 한 바위 아래에는 '지도바위'라는 안내 표지까지 있었다. 맞다. 꼭 우리나라 지도와 비슷한 모양을 한 바위가 능선에 있었다. '지도바위'에서 쭉 이어진 능선이 몹시 험악했다. 사람들이 험한 바위틈과 위를 지나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로 향하는 것이었다.

지도바위 능선에서는 경기도 과천과 안양 지역도 다 보였다. 서울 경기도의 모습이 바로 저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서울을 다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이 있다는 것이 대단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르고 있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거의 수직으로 오르는 바위에 쇠줄과 밧줄이 연이어서 사람들을 잡아 주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거의 수직으로 오르는 바위에 쇠줄과 밧줄이 연이어서 사람들을 잡아 주었다. ⓒ 서종규
지도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연주대의 모습은 무척 신기했다. 관악산 정상인 봉우리는 죽순이 솟아오른 듯한 모양을 한 기암절벽이 있는데, 그 위에 석축을 쌓고 자리잡은 암자가 연주대이다.

원래는 의상대사가 문무왕 17년(677)에 암자를 세우면서 '의상대'라 이름을 지었는데, 고려 멸망 후 조선을 반대하며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유신들이 이곳에 모여 멀리 개경 쪽을 바라보며 고려를 그리워하였다고 해서 연주대(戀主臺)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이 셋째왕자 충녕대군을 장차 태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눈치 챈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궁을 나와 관악산에 입산 수도하면서 이 연주대에 올라 왕궁을 바라보며 왕좌를 그리워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지금의 건물은 3평 남짓한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이다(관악산 정상에 세워진 '연주대 안내')

연주대가 있는 관악산 정상에 오르는 길을 특히 험했다. 거의 수직으로 오르는 바위에는 쇠줄과 밧줄이 연이어서 사람들을 잡아 주었다. 조금은 정비가 덜 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가파르게 오르는 마지막 봉우리를 향하여 사람들은 모두 비지땀을 쏟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넓은 너럭바위로 된 정상(632m) 부근엔 많은 사람들이 올라 쉬고 있었다.
넓은 너럭바위로 된 정상(632m) 부근엔 많은 사람들이 올라 쉬고 있었다. ⓒ 서종규
난 12시 30분 넓은 너럭바위로 된 정상(632m) 부근엔 많은 사람들이 올라 쉬고 있었다. 정상 바위 부근에 시원한 '냉막걸리'라는 통 2개가 있었다.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모여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맞다. 바로 최 선생이 마시고 오라는 그 막걸리 한 사발인 것이다. 갈증이 너무 심해진 입에 한 사발은 그냥 넘어 갔다. 한 사발에 3000원씩 받고 있었다.

관악산 정상 부근엔 레이더 관측 기지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방송 중계탑인지 몰라도 커다란 탑들이 연이어 있었다. 이러한 시설들이 사람들의 출입을 통째로 제한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위가 많다 보니 기이하게 생긴 바위들이 많다.
바위가 많다 보니 기이하게 생긴 바위들이 많다. ⓒ 서종규
하산 길도 가장 빠른 길을 택했다. 바로 국기봉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국기봉으로 내려오는 길도 계속 이어지는 바위 능선이었다. 내려가는 길이 몹시 험했다.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모습들을 바라다보며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국기봉엔 우리나라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바위 봉우리에 누가 커다란 국기대를 설치하고 국기를 게양하였는지는 몰라도 관악산 국기봉에는 늘 태극기가 펄럭거릴 것이다.

국기봉엔 우리나라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국기봉엔 우리나라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 서종규
혼자 하는 등반은 여유보다는 속도 위주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여러 사람이 같이 가다 보면 쉬면서 목도 축이고 정담도 나누어 재미가 있지만 시간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혼자 하는 등반은 잠깐 씩 쉬었다가 바로 뜨기 때문에 속도가 그만큼 빨라지는 것이다.

오후 2시, 자운암을 지나 다시 서울대학교 공학관 옆으로 내려왔다. 번개같이 올랐다가 구름처럼 내려왔던 관악산 등반이었지만, 오를수록 다가오는 서울의 정경이 눈에 가득하다. 그 빌딩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더 길게 흐른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서로 공유하는 것입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