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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112센터.
ⓒ 경찰청
사람이 죽었다. 그런 엄연한 현실 앞에, 분노는 차분한 비판을 앞선다. 분노만 하고 말 것이라면 몰라도, 언론이라면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파고들어야 한다.

하지만 언론은 틀린 팩트와 환상을 토대로 분노만을 양산하여 대중에게 팔고 있는 형국이다.

다음은 '안양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 한 중앙일간지가 인용한 경찰의 설명이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윤씨가 피랍 1시간 뒤인 지난 5월 15일 밤 11시58분부터 3분간 112에 한 차례, 그리고 남자 친구에게 두 차례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세 차례 모두 실제 통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범인의 감시를 피해 은밀히 번호만 잠시 눌렀기 때문인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용의자 김모(26)씨는 경찰에서 "어딘가 자꾸 전화를 걸려고 해서 휴대전화를 빼앗아 부숴버렸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당시 경찰 상황실에 걸려온 윤씨의 전화는 3초 정도 울리다가 발신자 번호만 남긴 뒤 끊어졌다. 하지만 경찰은 위치추적은 물론, 윤씨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는 등의 적극적 뒷처리에 나서지 않았다.

이 사건의 첫 피해자인 윤모(22)씨가 납치된 뒤 휴대전화로 112에 전화했지만, 경찰은 흔한 '장난 전화'거나 '실수'라고 생각해 무심히 넘긴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에 네티즌들은 관련 기사에 대한 댓글을 통해 미국 등 선진국가의 사례, 즉 '아이들이 장난으로 눌렀는데도 경찰이 출동을 했더라', '잘못 눌렀는데도 보안관이 집으로 찾아오더라'는 개인적 경험을 올리면서 경찰을 성토하고 있다.

당연한 반응이다. 그리고 이 기사를 쓴 기자도 우리나라도 선진국 경찰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112시스템' 아시나요?... 휴대전화 위치추적 거의 불가능

우리의 경우에도 유선전화는 신고하다 끊어져도 경찰의 출동이 가능하다. 그래도 정확한 신고위치가 표시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선전화, 즉 휴대전화일 경우다. 휴대전화일 경우는 신고자의 위치를 즉시 파악할 수 없다.

위치정보는 중요한 개인정보로 인권보호차원에서 '위치정보의 보호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긴급구조기관으로 지정된 소방방재청 등만이 위치정보사업자에게 개인위치정보의 제공을 요청할 수 있다. 그것도 배우자 또는 직계 존·비속의 긴급구조요청이 있는 경우 긴급구조 상황 여부를 판단해 요청해야 한다.

하지만 경찰에게는 이러한 권한이 없다. 경찰은 범죄라고 판단될 때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검사를 거쳐 법원의 '통신사실 확인자료제공' 허가장을 받아 위치추적을 할 수 있다. 물론 긴급한 경우는 먼저 통신회사에게 요청한 뒤 법원의 허가장을 받아 통신회사에 송부하면 된다.

그러나 구체적인 신고내용도 없이 착신번호만 남았을 경우, 경찰은 난감해진다. 서울지방경찰청 112센터에 근무하는 경찰관들은 다음과 같이 고충을 토로한다.

"서울의 경우 하루 24시간 동안 평균 약 3만건의 112통화시도가 있다. 그 중 신고내용이 명확하여 처리되는 것이 평균 5000~6000건이다. 그 외에는 오인·허위·장난 신고, 실수, 착신번호만 남는 신고 등이다.

착신번호만 남는 신고건수는 전체 112통화시도건수의 약 56% 정도이다. 하루 평균 1만5000건 가량이다. 실수로 접속되는 사례로는 011-2***-****와 같은 번호, 즉 실수로 0을 누르지 않아 곧바로 112신고가 되는 경우이다."

"솔직히 착신번호만 표시되는 신고를 범죄로 판단하고 그 모두를 수사 절차로 전환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본다. 통화가 되어 긴급한 상황임을 안다고 해도 그 위치, 즉 관할을 모르기 때문에 서울지방경찰청 부근의 종로경찰서에만 수사를 의뢰한다.

아마 종로경찰서도 죽을 맛일 것이다. 수사에 착수한다는 것은 법원의 허가장이 사전이나 사후로 나와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절차를 밟다 보면 정말 급박한 경우에는 무용지물이다."


실제 이번 연쇄살인의 첫 희생자의 경우, 최초 신고를 한 지 몇 분만에 핸드전화를 빼앗겼고 1~2시간 안에 살해당했다. 휴대전화는 2시간 30분만에 배터리가 제거된 채 버려졌다.

▲ 지방 경찰서의 112 지령실. 접수, 지령, 상담까지 1~2명의 요원이 처리한다.
ⓒ 경찰청
#2. 착신번호로 다시 전화 걸라구요?... 범인에게 고자질 하는 꼴

이상과 같은 법적 현실을 무시하고 만약 경찰이 112신고 착신번호만을 토대로 범죄로 인지하고 신속하게 핸드폰 위치추적에 나섰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위치추적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지점이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적지 않은 경찰관들이 모두 출동을 하여 그 주변을 수색해야 한다.

그럼 기자가 지적했듯이 착신번호에 대해서 경찰이 전화를 다시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장난·허위·오작동 신고라면 문제없다.

그러나 너무나 위급하여 제대로 된 통화도 못하는 신고자에게 다시 전화를 한다는 것은 경찰이 범죄자에게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했대요'라고 고자질하는 것과 같다. 몇 년 전 모 언론사 기자가 특종 욕심에 납치 피해자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하는 일이 있었지만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 없는 경찰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조치이다.

이 정도가 그나마 대한민국 최고의 112신고 접수·지령 시스템이 마련된 서울지방경찰청의 실태이다. 서울지방경찰청에는 접수요원과 지령요원의 전문화, 각 경찰서와의 네트워크 구성, 긴급사건의 우선처리 등등의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서울의 경우다. 이번 사건이 일어난 경기지방경찰청의 여건은 더 열악하다.

각 경찰서 별로 소수의 112요원이 서울의 경찰서보다 적지 않은 신고를 처리한다. 경찰서 관할을 인식할 리 없는 통신시스템은 신고 관할도 종종 틀린다.

안양경찰서의 경우 주변의 시흥·군포·과천·광명경찰서와 고속도로순찰대에 대한 112신고가 안양경찰서 관내의 신고와 뒤섞여 접수된다. 서울경찰과는 달리 지방경찰은 이를 일일이 해당 관할에 통보해주는 업무까지 맡고 있는 셈이다.

엉뚱한 경찰서에 112 신고된 것에 불만을 가진 신고인의 항의를 받고 입씨름하는 것은 112 근무자의 당연한 덤이다.

#3. 해결책은 있다... 핸드폰 'SOS 기능' 묵히지 말자

해결책은 있다. 우선 휴대전화에 의한 112신고도 유선전화의 경우처럼 신고자의 위치가 신고 즉시 파악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선전화가 이미 위치파악이 된다면 휴대전화라고 해서 안될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고 본다. 실수든 고의든 수사기관에 112신고를 한 시민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인권침해일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이 112신고를 통해 어느 특정인의 위치파악을 의뢰하는 것과 구분해야 한다).

요는 시민이 언제 어디서든지 112신고 버튼만 누르고 혼절하더라도 경찰이 그 위치를 추적해 출동할 수 있도록 바꿔야 제대로 된 112신고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둘째, 서울경찰의 112센터처럼 한 곳에서 신고를 접수하고 범죄를 분석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그 즉시 관할경찰서에서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전국 각 지방경찰청에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서울경찰처럼 많은 경찰관이 접수와 지령을 담당하고 동시에 상황의 긴급정도에 따른 지방청과 경찰서의 지령 분산 시스템도 갖추어야 한다.

셋째, 실수 또는 장난 신고가 될 여지를 없애야 한다. 그래야 신고에 대해 긴장하고 적절한 조치가 가능하다. 흔히 발생하는 011-2****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장난전화에 대한 규제를 좀 더 엄격하게 할 필요가 있다. 범죄 상담 등 비교적 긴급하지 않는 신고 등은 112신고를 피하는 등의 국민적 협력도 필요하다.

넷째, 개인적 차원에서의 대비책이다. 핸드폰에 있는 'SOS 메뉴'를 이용하자. 모든 핸드폰 기종에 있는 메뉴인지는 모르겠지만, 핸드폰 매뉴→메시지→메시지관리→000 SOS(기종에 따라 다른 명칭)의 기능을 이용하라는 점이다.

종류에 따라 핸드폰에는 옆부분의 버튼·기능음 크기 조절 버튼을 짧게 4회 이상만 누르면 가족, 지인, 112, 119등에 긴급구조 메시지가 동시에 전달되는 기능이 있다.


비난부터 하기 전에...

만약 잘못 눌렀다면, 본인이 즉시 연락하여 신고를 취소하면 될 것이다. 한동안 그런 취소신고가 없다면 경찰은 본격적으로 법원에 영장을 받아서라도 수사에 착수해 범죄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적는 기자에게도 아내와 딸이 있다. 삼가 고인의 영전에 명복을 빈다. 남의 일 같지 않다. 고인의 가슴 아픈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국민적 관심과 성원으로 예산, 인력, 법과 제도 등의 시스템을 어느 정도 갖추어 놓고 '왜 경찰이 그 모양이냐'고 비난한다면 경찰인 기자도 비난에 동참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분노 보다는 차분한 비판으로 앞으로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믿고 있는 현직 경찰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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