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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겉그림.
ⓒ 또 하나의문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그런데 어머니날이라거나 무슨 다른 특별한 날이 아니었어요
지난밤 그는 저를 또 두드려 팼지요
그런데 그전의 어떤 때보다 훨씬 더 심했어요
제가 그를 떠나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아이들을 보호하죠?
돈은 어떻게 하구요?
저는 그가 무서운데 떠나기도 두려워요
그렇지만 그는 틀림없이 미안해 할 거예요
왜냐하면 오늘 저에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어요
바로 제 장례식이었거든요
지난 밤 그는 드디어 저를 죽였지요
저를 때려서 죽음에 이르게 했지요
제가 좀더 용기를 갖고 힘을 내서 그를 떠났더라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 피해 여성이 피해 여성에게 주는 편지 - 본문 중에서.


이 책은 여성 학자 정희진이 10여 년간 여성폭력 문제에 관한 상담을 하며 인터뷰했던 여성들의 사례를 바탕으로 써 낸 '아내폭력에 관한 보고서'이다. 처음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에는 이렇게도 끔찍한 내용일 거라는 짐작을 하지 못했다. 별 생각 없이 펼쳐 넘긴 책 속에는,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해 처참한 생활을 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경험담이 실려 있었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기에는 같은 인간으로서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하지만 함께 풀어나가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도 깊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문제라 여겨졌다. 그럼에도, 내 일이 아니라고 해서 모르는 척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상처받은 폭력의 희생자들을 위해, 앞으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미래의 구성원들을 위하여 아내폭력 문제는 제기되어야만 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약자 중 한 명으로서 나는, 저자 정희진의 연구 결과를 빌어 아내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시대에서, 먼저 그 폭력의 실태를 파악하고 나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내폭력이 아이들 폭력으로 이어지는 다수의 사례를 참고한다면, 아내폭력과 가정폭력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내폭력'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경험해 온 역사이다.

조선 후기 유학자였던 이덕무는 "남편과 시부모가 성질이 포악해서 때리고 구박하여 집에 못 있게 하더라도 친정에 돌아가는 것은 배반이 아니겠는가"라고 적고 있고, 조선시대 여성들의 생활 지침서였던 내훈 2권 부부장에는 "남편을 아버지같이 섬길 것이나, 혹 그릇된 일을 간하였다가 매를 맞는 일이 있더라도 노하기는커녕 전혀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다.

서양에서도 '아내폭력'은 고대 바빌론 시대에서부터 현대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왔다. 현재 미국에서 아내 구타는 강간, 자동차 사고, 강도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외상의 이유이며, 여성이 다치는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아내폭력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왜 그에 대한 대책은 미비할까? 몇 가지 원인을 찾아 살펴본다면, 첫째로 가정이 '치외 법권 지대'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활동영역을 공·사로 구분 짓는 관념에 따르면, 가정은 사회활동을 하는 장소가 아닌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분류되고, 법 적용이 난해한 공간이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해, 가정 내 폭력은 법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내부적인 문제'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가정은 지켜져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때리고 맞는 관계라도 부모 밑에서 성장해야 정상이며, 그렇지 않은 가정을 '결손' 가정이라고 보는 것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통념이다. 사람들은 폭력 가정이 결손 가정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폭력을 거부한 독신모 가정은 결손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인식이 이러하기에, 폭력을 당하는 아내들은 '그래도 가정은 지켜야지'라는 믿음으로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3~4년 전에도 이혼하려고 했지만, 아이들이 아직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나이고 솔직히 누가 이혼한 집 자식들하고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아이들 장래를 생각해서 참았지요(43세, 고졸, 주부, 여성). - 본문 인터뷰 사례 중에서

셋째로, 아내폭력을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여성의 권리 신장은 다방면에서 급속도로 이루어져 왔지만, 여전히 가정 내의 위계질서는 존재한다. 책에 등장하는 폭력 사례 중에서 '아내와 북어는 팰수록 맛이다'는 구시대적 속담을 인용하는 폭력남편이 있었다. 폭력을 그저 아내 훈육의 수단이라 생각하는 그는, 자신이 '가해남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또한 '누구의 아내' 외에 사회적 지위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성일 경우,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탈출했다 해도 또 다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고통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아내 폭력의 피해자들을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자포자기한 채로 살아가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렇지만, 그들은 분명히 행복할 권리가 있는 '주체적' 존재이다. 폭력에서 벗어나 당당히 삶을 설계해 나갈 권리가 있는 것이다.

또한, 폭력은 벗어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대물림 된다. 맞으며 자란 아이들이 폭력적인 성향의 어른으로 자라날 확률이 높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피해자 자신과 아이들의 앞날을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하루 빨리 폭력 가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을 위한 길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른 것이 현실이다. 누군들 맞으며 사는 게 행복하겠는가. 이제껏 가정의 틀 안에서만 생활해 온 여성들의 경우에는, 이혼을 선택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비롯될 육아문제라든가 생활고의 문제는 그녀들에게 '그냥 참고 살자'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현 정부에서는 '남성-여성-아이들 둘'로 구성되는 4인 가족의 형태를 '정상'으로 규정하고(Normal Family) 그 가족의 형태에 따라 법을 제정한다. '정상' 이 아닌 가족들은 '결손 가정'(broken Family) 로 분류되고, 제대로 된 정부 복지 혜택을 받기 힘든 것이다. 이혼율이 40%에 육박하는 현실에는 도저히 맞지 않는 정책이다.

더 이상 가정 폭력을 '가정 내부의 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다. 정부에서는 복지정책을 현실에 맞추어 바꾸고, 폭력 가정의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혼 가정을 '비정상'으로 바라보는 낡은 시선 또한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것은, 불행한 가정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기억하며, 하루 빨리 폭력 가정에서 벗어나 새 삶을 꾸리는 여성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만일 폭력을 당하고 있다면, 즉시 전국 어디서나 국번없이 1366으로 도움을 청하십시오. 1366은 112, 119와 같이 국가 혹은 국가에서 위탁한 여성 단체에서 24시간 운영하는 공식적인 여성위기 전용 전화입니다. 1366에서 적당한 대처 방식과 법적, 의료적, 사회 복지적 절차와 기관을 안내 받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 폭력과 여성 인권

정희진 지음, 또하나의문화(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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