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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짜리 마늘이라 단단하고 향이 짙습니다
6쪽짜리 마늘이라 단단하고 향이 짙습니다 ⓒ 김관숙
우선 마늘 한 접을 까서 장아찌를 조금 담고, 나머진 갈아서 조금씩 뭉쳐 냉동실에 두었습니다.
우선 마늘 한 접을 까서 장아찌를 조금 담고, 나머진 갈아서 조금씩 뭉쳐 냉동실에 두었습니다. ⓒ 김관숙
밤새 알맞게 잘 절여진 배추들을 새벽에 손질을 한번 해 두었다가는 아침을 먹고 나서 배추를 씻어 건져놓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소를 만들어 포기김치 담기를 시작했는데, 한나절이나 걸렸습니다.

배추를 4등분해서 모두 32쪽이나 됩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가을이면 열 다섯 포기나 하는 김장을 생각하고는 '뭐 이까짓 거' 했는데, 한쪽 한쪽에 소를 넣다보니 허리가 결리고 시간도 꽤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배추가 알맞게 절여 졌습니다.
배추가 알맞게 절여 졌습니다. ⓒ 김관숙
이만큼씩 두 양푼이나 됩니다.
이만큼씩 두 양푼이나 됩니다. ⓒ 김관숙
시간이 꽤 걸리고 힘은 들었어도 그렇게 한목에 해서 김치냉장고에 귀빈을 모시듯이 저장해 두고 나니까 꼭 김장을 하고 난 기분이 듭니다. 얼마나 뿌듯하던지…. 장마가 길던 짧던 간에 석 달여 동안은 맘껏 김치찌개를 해먹고 김치해물부침개를 해 먹어도 김치 걱정을 안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뒷정리를 말끔히 마치고 나서 자꾸 결리는 오른쪽 허리를 툭툭 치고 있는데,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남편이 들어옵니다. 남편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배추 쌈 좀 남겼냐"고 묻다가 식탁에 소복하게 빼놓은 노란 배추 속 이파리들을 보고는 말을 돌려 "커피 먹게 포트에 물 좀 부어"라고 합니다.

나는 아직 점심도 먹지를 못했는데, 남편은 참 눈치도 없습니다. 그래도 포트에 물을 붓고 코드를 꽂았습니다.

남편이 커피를 타는 동안 나는 점심을 먹습니다. 허리가 결리고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먹던 청국장만을 달랑 데우고 식탁 위에 탐스럽게 있던 배추 쌈을 싸 먹습니다. 그제야 남편이 나를 보았습니다.

"거 인제 점심을 먹어? 반찬이 거 밖에 없어?"
"그 말 전에 할 말 없어?"
"아 글치, 우리 마누라 수고했네. 어, 수고!"
"내가 군인이야? 거수례를 하게! 이런 경우 엎드려 절 받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거야."


젊었을 적에는 수고했다는 말 따위는 바라지도 생각지도 않고 살았습니다. 김치뿐만이 아니라 무슨 음식이든 간에 정성껏 푸짐하게 만든 것을 가족들이 맛있게 많이 먹어주면 그것으로 보람을 느끼고 얼마나 즐거워하고는 했는지….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까 이상하게도 '수고했다'든지 '힘들었지'라는 말이 듣고 싶어집니다. 내가 생각을 해도 유치하고 웃음이 납니다. 이런 심리가 이제는 늙었다는 것을 의미 하나 봅니다.

피곤한데다가 배가 고픈 김에 밥을 많이 먹었더니 식곤증이 옵니다. 하품은 자꾸 나고 내가 내 모습을 내려다 봐도 파김치가 다 된 모양새입니다. 그래도 남편의 입맛을 생각하고 장바구니를 챙겨들고 현관을 나서는데, 그런 내 모습이 안됐던지 힐끔 내 눈치를 보며 남편이 따라 나섰습니다.

나는 우리 아파트단지 안에 슈퍼로 장을 보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대형백화점으로 가자고 하면서 주차장으로 갑니다. 백화점으로 가자는 말에 그만 나는 반짝합니다. 엎드려 절 받은 섭섭함이고 뭐고 나는 못이기는 체 하고 따라 갑니다.

백화점에 가서 생각지도 않았는데, 남편이 유명 메이커 운동화를 사 줍니다. 그러잖아도 몇 년 신은 운동화가 밑창이 매끈하게 닳고 낡아 새로 살 생각을 하고 있던 차입니다. 남편 운동화도 새로 살 때가 되어 갑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내 운동화를 살 때 남편 운동화도 사 줄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신고 싶은 운동화의 값이 웬만한 구두보다 더 비쌉니다.

세월이 정말 빠르고 무섭기는 합니다. 이제는 정장에 예쁜 구두를 신고 외출할 때보다 건강을 지키며 살기 위해 스포츠 복에 운동화를 신고 이런 저런 운동을 하러 다니는 날들이,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신던 운동화를 좀 더 신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내가 운동화를 신어 볼 생각을 않자 남편이 뜻밖에 말을 합니다. "회원들과 게이트볼 연습을 할 때 보니까 당신 운동화가 제일 낡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말 말고 신어보기부터 하라고 말합니다. 남편은 전에 없이 눈을 크게 뜨고 강하게 나옵니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 입니다.

"자기 운동화도 다 됐잖아."
"아주 내 것도 살까 그럼."


그냥 해 본 말인데 남편은 냉큼 자기 운동화도 골랐습니다. 진작부터 모델을 생각해 두고 있었던지 매장 직원에게 운동화 하나를 가리키며 운동화 사이즈를 말해 줍니다.

기가 막혀! 남편의 속이 드려다 보입니다. 아마도 YMCA에서 새벽 수영을 하고 나오는 길에 보니까 자신의 운동화가 바꿀 때가 지나서 무척 초라해 보였던가 봅니다. 그렇게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운동화만 새로 사 신기가 무엇해서 내 운동화를 사 준 것만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어쨌거나 운동화도 사고 백화점 지하에 있는 대형 마트에서 장도 푸짐하게 봤습니다. 남편이 간만에 거금을 썼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끈을 구멍에 꿰었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빛을 발하고 있는 운동화를 신어봅니다. 매장에서 신어 볼 때보다 더 예쁘고, 더 마음에 쏙 듭니다.

눈이 부십니다. 우리 부부의 건강을 지켜 줄 것입니다.
눈이 부십니다. 우리 부부의 건강을 지켜 줄 것입니다. ⓒ 김관숙
왠지 이 새 운동화가 내 건강을 지켜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 못지 않은 아름다운 시절을 누리면서 살게 될 것만 같습니다.

그 사이 새 운동화에 끈을 꿰어 신고 거실 저만큼에서 서성거리던 남편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뛰어 오르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주름진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웃겨서 나는 웃음이 막 터져 나옵니다. 내가 좋아하는 개그맨 갈갈이 박준형보다 더 나를 웃깁니다. 정말 오래 살고 볼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마트에 가서 장을 볼 때까지만 해도 결리던 오른쪽 허리가 아무렇지도 않아진 것입니다. 나는 남편 모르게 오른쪽 허리를 이리 저리 움직여 봅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눈물이 질금거리게 실컷 웃는 바람에 그만 통증이 놀라서 가뭇없이 달아났나 봅니다.

남편은 새 운동화를 신발장에 모셔 놓더니 '새벽 수영하러 갈 때 먼저 신을까, 게이트볼 하러 갈 때 먼저 신을까'하고 즐거운 고민(?)이 넘치는 눈으로 중얼거립니다.

나는 그냥 기쁘고 즐겁기만 합니다. 남편의 선물이지만 내 신발을 사러 생전 처음 누군가와 같이, 그것도 남이 아닌 남편과 같이 신발매장에 갔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아침부터 벌을 서다시피 식탁에 붙어 서서는 한나절에야 끝난 김치담기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받은 것만 같습니다.

1년 먹을 마늘도 준비해 두었고, 삼복더위 긴 여름을 보내고도 남을 김치도 저장해 두었고, 내 건강을 지켜 주고 새롭게 아름다운 시절을 열어 줄 새 운동화도 생겼고, 장도 푸짐하게 봐 왔고…. 아! 지금 내 기분은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입니다.

늘 이런 기분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늘 이런 기분으로 살도록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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