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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선의 <북한 영화 속의 삶 이야기> 앞그림.
전영선의 <북한 영화 속의 삶 이야기> 앞그림. ⓒ 글누림
북한 주민들의 삶에 대해 관심이 있으면서도 막상 손이 가는 책은 별로 없다. 이론적으로 혹은 이념적으로 접근한 책들은 아무래도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이 책은 북한 영화 속에서 살펴볼 수 있는 북한 주민들의 삶의 면면들을 다룸으로써 그 삶의 대강을 알아볼 수 있게 한다.

북한 영화 중 첫머리에 꼽을 수 있는 작품은 <도라지꽃>(1987)이다. 진송림이라는 여성 인물을 내세워 묵묵히 산골마을을 지키며 문화농촌을 가꾸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말하자면 소설 <상록수>의 채영신 비슷한 역할이라고 하겠다. 그만큼 이 영화는 '향토를 사랑하는 일이 진정한 애국'이라는 등식을 보여주면서 북한의 이전 시기와는 다른 인간형을 제시한다.

숨은 영웅 찾기는 1980년대의 화두였다. (…) 현실적인 문제를 중시하는 숨은 영웅 형상문학이 제기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숨은 영웅 따라 배우기 운동이 대중운동으로 전개되었고, 문화예술에서도 항일무장혁명 투쟁 일변도에서 생활문화 속의 숨은 영웅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소재가 다양해졌다. (61쪽)

이러한 유형은 <높이나는 새>라는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예군인으로 통신원으로 일하다 숨진 남편의 뒤를 이어 우편통신원으로 일하는 영심이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이 여인은 우편과장 자리도 마다하고 또 딸의 진학을 위한 도시행도 뿌리친 채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의 우편통신원 일을 계속한다. 물론 딸과 충돌이 있었지만 딸 역시도 뒤늦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랑스러움을 깨닫고는 그 뒤를 이으려 한다는 내용이다.

북한 영화는 대체로 '교훈성'을 강조하는 듯싶다. 대부분의 주인공이 어떤 집단 내에서의 문제 사례에 부딪히지만 그것을 주인공의 지혜와 희생으로 풀어나간다는 이야기 구조이다. 그러다 보니 집단 내 문제유발자가 주인공의 계도와 봉사 등에 의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집단에 조화롭게 포섭된다는 내용으로 연결되는 것이 상당수이다.

이를테면 <우리 인민반장>(1986)의 주인공 순영은 반원 간의 시비나 반원의 개인적인 애로사항을 중간에서 해결해 주기도 하고 인민반 활동을 소홀히 하는 순옥을 반성하게 하기도 한다. <우리 대의원>(1987)의 주인공 주봉숙은 도배지와 장판지 확보라는 물자 문제와 포구 건설 문제를 놓고 갈등하지만 결국 적극적인 행동으로써 이 문제들을 해결해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포구 건설 문제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던 부위원장과, 큰아버지에 기대어 안락한 삶을 꿈꾸던 그녀의 딸 설미의 반성도 이끌어낸다. <키우는 마음>(1990)도 "소년단의 말썽꾸러기 학생을 (소년단의 지도원인 은정이) 잘 선도하여 모범적이고 훌륭한 학생으로 키워낸다"는 서사 구조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일 먼저 보았던 부분은 <피묻은 략패>(2002)라는 영화 소개 내용이었다. '독도'를 소재로 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략패'란 단어가 낯선데 '약도를 그린 패쪽'이란 뜻이다. 유리왕 설화를 떠올리면 알 수 있듯이 부자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신표 같은 것이다.

이 영화는 "고려시대를 역사적 배경으로 독도가 옛날부터 한반도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금불상의 위치가 그려진 약도를 아버지(천무봉)와 세 형제(천석파, 천석조, 천석해)가 목숨을 걸고 (왜구들로부터) 지킨다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내레이션 부분은 주제를 강화한다.

그 때로부터 여러 백년이 흘러간 오늘날에도 왜구는 변함없이 동해바다 수평선 위에 홀로 떠 있는 우리나라 섬인 독도를 빼앗으려고 피어린 야욕을 품은 채 칼을 벼리고 있다. … 독도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우리의 땅 … 이제 만일 왜구가 또다시 우리의 강토에서 성스러운 이 섬을 잘라내 제 것으로 만들려는 어리석은 야망을 내보인다면, 그들은 동해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조선 민족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뼈에 사무치게 목격하게 될 것이다. (201쪽)

전통의 가치를 강조한 <우리의 향기>.
전통의 가치를 강조한 <우리의 향기>. ⓒ 본문사진
<우리의 향기>(2003)라는 영화는 '우리민족제일주의'(1980년대부터 시작된 조선민족제일주의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이념화된다. 영화 <홍길동>(1986)도 이러한 배경 하에서 창작된 것이다. - 97쪽)를 바탕으로 민족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함을 두 가정의 대조를 통하여 코믹하게 보여준다. 전통적인 것을 지켜나가는 병호네와 서양식 생활에 젖어 있는 샛별네의 대조를 통하여 전통문화의 계승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태도는 <금강산으로 가자>(1986)에서도 나타나는데 이 작품은 '우리의 약은 우리 땅에서 그 재료를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도 있기는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한데 북한도 농촌 총각의 인기가 없나 보다. <도시처녀 시집와요>(1993)는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이다. '옥류풍경'(2001)은 북한 사회의 상식으로는 결합이 쉽지 않은 처녀 빙상무용수(피겨스케이팅) 류순애와 옥류관 총각요리사 무한기의 사랑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다. 특히 <봄날의 눈석이>(1985)는 남한을 상징하는 '영아'와 북한을 상징하는 '남수'를 연인 사이로 설정하여 "남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봄눈 녹듯이 녹아 버리고 통일로 가야 한다"는 내용을 주제로 한다.

위는 <도라지꽃>에서 진송림으로 열연한 배우 오미란. / 아래는 교통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네거리 초병>.
위는 <도라지꽃>에서 진송림으로 열연한 배우 오미란. / 아래는 교통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네거리 초병>. ⓒ 본문사진
이 책은 북한 주민의 주요 생활 영역에 대한 지식도 제공하고 있다. 교통보안원 이야기를 담고 있는 <네거리 초병>(1986)을 다루면서 "평양도 1980년대 신도시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도시교통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는 것을 시작으로 "평양 시내에 들어오는 모든 차량은 깨끗하게 세차해야(북측 자동차의 대부분은 국가기관 소속이므로 이러한 차량이 지저분하다는 것은 관리 소홀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한다는 것이다.

또 북쪽에서는 우리가 부르듯이 냉면을 냉면이라 하지 않고 그냥 '국수'라고 통칭하는데, 그 이유는 북한에서는 냉면이 국수보다 더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가르는 기준은 '면의 성분'에 있다고 한다. 평양식 냉면에는 메밀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물냉면이 주류이고 함흥식 냉면은 감자 전분이나 옥수수, 고구마 전분이 많이 섞인 비빔냉면이 중심이라고 한다.

'눈석이'(눈석임)라는 말이 와닿았다. 순우리말로 "봄이 되어 햇볕에 눈이 속부터 녹아내리는 것"이라는 뜻을 품고 있는 말이다.

덧붙이는 글 | * 지은이: 전영선 / 펴낸날: 2006년 4월 14일 / 펴낸곳: 도서출판 글누림 / 책값: 13000원


북한 영화 속의 삶이야기

전영선 지음, 글누림(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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