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용추계곡의 여름
용추계곡의 여름 ⓒ 김선호
등산객들의 신발이 조금 이상했다. 분명 등산복 차림의 산행객이 맞는데 등산화 대신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슬리퍼를 신고 등산을 하다니.

하산하는 등산객들의 어찌보면 비상식적인 슬리퍼에 대한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계곡물이 흘러들어 산길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산길에 물길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사람의 길이란 없었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흙길과 물길이 있을 뿐이었다. 산이 있어 물길을 만들어 내고 그 물길은 산을 돌며 흐르고 있을 뿐.

여름이 깊어가는 용추계곡엔 이른 아침부터 물놀이를 하러 온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러나 용추계곡의 물길은 하냥 길고 넓었으므로 인적은 그저 자연 속에 묻힌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용추계곡은 웅장함으로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첫번째 만난 물길. 징검돌을 놓기위해 애를 쓰고 있는 아이들 앞에 슬리퍼를 신고 여유있게 건너오는 아저씨가 대조적이다
첫번째 만난 물길. 징검돌을 놓기위해 애를 쓰고 있는 아이들 앞에 슬리퍼를 신고 여유있게 건너오는 아저씨가 대조적이다 ⓒ 김선호
계곡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건만 칼봉을 가기 위해선 용추계곡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어디로 가느냐는 아이들의 질문에 "칼봉"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칼봉이라는 이름에 대한 의문부호는 일단 보류해 두었다. 지금은 미지의 세계를 보러가는 길이다. 산을 오르기 전에 기본 정보를 챙기곤 했던 습관은 이번엔 과감하게 생략했다.

그것이 옳았던 것인지 아닌지는 산행이 끝나도록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육산이라는 한마디에 그냥 안심하고 칼봉을 가기로 했던 것이다. 해발 899m, 아이들을 앞세우고 가는 산행으로는 결코 낮은 산은 아니다.

그러나 하산하는 등산객들의 슬리퍼를 눈여겨봤어야 했다. 칼봉에 대한 사전정보를 샅샅이 파악하지 못했더라도 용추계곡에 대한 정보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초록빛 산을 닮아 계곡도 파랗다.
초록빛 산을 닮아 계곡도 파랗다. ⓒ 김선호
계류의 속도가 자못 위협적이었고, 넓이는 내가 아는 여느 계곡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넓은 계곡이 형성 될 수가 있단 말인지. 용추계곡의 위협적인 계류에 막혀 주변을 살펴보았다.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디고 끝이 안 보이는 산과 산을 잇는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었다. 80% 이상이 산이라는 가평 땅의 위력을 그곳에서 비로소 실감할 수가 있었다.

슬리퍼가 필요했다. 혹은 물에 빠져도 젖지 않은 등산화가 필요했다. 산길을 끊어놓은 물길 위에 단단한 징검돌이 놓여있는 곳도 있었지만 그것은 계곡 하류 쪽에 한해서였다. 계류가 빨라지는 상류로 갈수록 징검돌의 위치가 위험하게 놓여지기 일쑤였다. 산을 오르는 일이 아닌 계곡을 건너는 일로 몇 번을 길 앞에서 멈칫했던가.

우회를 해도 역시 물길이 앞을 가로막곤 했다. 마침내는 칼봉을 앞에 두고 이대로 돌아서야 하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미리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생겼던 건 아이들을 동반한 까닭이었다.

때로는 엉금엉금 징검돌을 건너야 했지요.
때로는 엉금엉금 징검돌을 건너야 했지요. ⓒ 김선호
여기까지 왔으니 물놀이나 하고 가자며 마침내 등산화까지 다 벗어 던지고 가장 열악한 징검돌을 어렵게 건너 반대편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 계획을 번복해 등산화 끈을 다시 질끈 동여매야 했다. 건너온 물길이 마지막 물길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칼봉 가는 길이 매끈하게 뻗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물길을 다 건넌 것이다. 입구에 표시된 2.3㎞가 다시 한번 힘을 내라고 기운을 주는 것 같았다(정확하지 않지만 실제론 3㎞도 훨씬 넘는 거리였다).

칼봉은 ‘육산’임이 분명했다. 숲이 깊으니 물은 여기저기서 흘러 넘쳤고, 흙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부드러운 흙길을 밟는 일이 행복하기까지 해서 된비알로 이어지는 구불어지고 에돌아가는 산행이 힘든 줄로 모르고 올랐다.

때론 물길에 막혀 망연자실 하기도 했구요.
때론 물길에 막혀 망연자실 하기도 했구요. ⓒ 김선호
아이들도 엄청난 계류에 쓸려갈 것 같은 계곡을 넘어왔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씩씩하게 앞장서 잘도 오른다.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계곡 건널 때 무섭지 않았어?" 오히려 재밌었다는 아이들의 반응이 의외다. 뭔가 독특한 느낌이 좋았다는 것이다.

칼봉을 가리키는 등산로를 따라 중간지점까지 왔을 땐 그러나 힘이 딸리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계곡길을 건너느라 힘을 너무 많이 소진한 모양이다.

산 정상에서 벌일 계획이던 파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침 딸아이 생일이었던 것이다. 주변을 살피니 식탁같은 널따란 바위가 있어 그 위에 준비해온 케이크와 과일, 음료수를 놓았다.

마침내 등산화 끈을 풀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등산화 끈을 풀기로 했습니다. ⓒ 김선호
나뭇잎 접시 위에 간단하게 마련한 음식을 놓으니 제법 그럴 듯 하다. 쪽동백의 나뭇잎은 넓어서 좋고 하나의 가지에 두개가 모여나는 단풍나무와 다섯 개의 타원형 잎새가 둥글게 모여있는 철쭉잎도 접시로 그만이다.

마침 하산하던 등산객들이 뜻밖의 풍경에 발길을 멈추고 동참해 주었다. '참 의미있는 생일파티'라며 기꺼이 생일축하 노래도 함께 부르고 박수로 아이의 생일을 축하해 주셨다. 오가는 등산객들의 축하를 받으니 오붓한 생일파티가 근사한 숲속의 파티가 되었다.

결국엔 정상적이(?) 등산로에 도착했습니다.
결국엔 정상적이(?) 등산로에 도착했습니다. ⓒ 김선호
그분들 말마따나 숲속에서의 아이의 생일 파티는 특별했다. 식탁(?)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일제히 나뭇잎을 흔들어 축하를 보냈다. 바람소리에 맞춰 산새들의 합창소리는 끊일 듯 이어졌다.

간단한 식사를 끝내고 다시 산길을 따라 칼봉을 향한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등산객들의 숫자가 늘었다. '오, 필승 코리아~' 월드컵 기간이라 산에서 만나는 이들도 응원가로 인사를 나눈다. '너희들 올라오는거 보니까, 우리나라가 꼭 이기겠다'는 어른들의 칭찬에 아이들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19일 새벽 16강을 앞두고 프랑스와 경기를 하루 앞둔 날).

참나무 군락이 주능선을 점령하고 그 사이로 철쭉이 산길 양옆으로 사열하듯 자라있다. 칼봉 가는 주능선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몇백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떡갈나무와 신갈나무. 이들 나무는 참나무숲 속에서도 유난히 돋보였는데 오랜 인고의 세월을 지나온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했다.

숲속에서 조졸한 생일 파티를 벌였습니다.
숲속에서 조졸한 생일 파티를 벌였습니다. ⓒ 김선호
바위틈을 뚫고 자란 나무가 있는가 하면 동물들에게 보금자리를 내주고도 가운데가 텅빈채로 잎을 틔운 나무도 있었다.

'칼봉 2봉'을 지나니 갑자기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은 다시 오르막길로 이어지고 마침내 칼봉정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상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어느때보다 가슴이 뿌듯해진다.

힘든 여정 끝에 당도한 산이기에 뿌듯함은 배가 된다. 아이들도 꼭 한번 안아준다. 899m 임에도 당당한 이름을 얻지 못하고 그냥 봉우리에 머문산, 칼봉.

딸아이의 생일을 함께 축하해준 등산객들 입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딸아이의 생일을 함께 축하해준 등산객들 입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 김선호
정상이 밋밋한 탓이었을까, 주변에 포부도 당당하게 치솟은 산들이 많은 탓일까. 북서쪽으로 멀리 매봉이 바라다 보인다.

발을 디뎌본 연인산과 명지산은 동쪽에서 반긴다. 슬리퍼를 준비해 가지 못한 우리가족은 내려오면서 아예 등산화를 벗어들었다. 용추계곡을 거쳐 칼봉을 오르려면 물길 또한 산길의 연장임을 인정하면서.

내려오는 길, 여유를 가지고 계곡을 바라보니 이런 웅장함도 보입니다.
내려오는 길, 여유를 가지고 계곡을 바라보니 이런 웅장함도 보입니다. ⓒ 김선호

덧붙이는 글 | 경기도 가평군 승안리와 경반리의 경계를 이루는 칼봉은 주능선이 칼처럼 
날카로운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랍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