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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상하권 두 권입니다.
책 겉그림, 상하권 두 권입니다. ⓒ yes24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과 신라의 신조 박혁거세, 그리고 가야의 시조 김수로는 다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탄생 역사를 ‘난생(卵生)신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들은 그렇게 배웠고, 지금까지도 그 기억은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박혁문이 쓴 〈정설 주몽〉(늘봄·2006)은 그야말로 다르다. 이전까지 머리 속에 뱅뱅 돌았던 난생신화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고구려 건국신화의 주역인 주몽이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 있는 실존 인물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주몽은 알 껍질을 깨고 나온 인물로 여겼다. 하지만 10여 년간에 걸친 박혁문의 철저한 고증과 집요한 해석, 그에 따른 의미를 부여한 사실들이 이 책에 녹녹히 담겨 있다.

“유화가 드디어 아이를 낳았다. 딸을 원하였지만 불행하게도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이 아이의 운명은 험난했다. 어느 날 누군지 모르는 자들이 납치해 간 것이다. 더러는 산 속에 버렸다고 했고 혹자는 마구간에 버렸다고 했다. 아무튼 아이의 행방은 지난 이십 년 간 알지 못했다. 죽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상권, 262쪽)

그 뿐만이 아니다. 그 당시의 통치 방식은 제정분리 사회였다. 부여의 ‘영고(迎鼓)’나 고구려의 ‘동맹(東盟)’과 같은 제천의식에서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자칫 주몽을 제사장의 위치에 서 있는 신화적인 인물로 그려낼 수도 있지만, 주몽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부족과 군대를 통치했던 실제적인 왕으로 묘사했다.

“추모는 동서남북을 순나부 연나부 절나부 관나부로 사분하고 중앙을 계루부라 정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따라 부족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마리와 오이, 협보 그리고 이곳 졸본성의 맹주였던 소서노를 대가로 삼아 각각 하나의 나부를 다스리게 하였고 자신은 졸본성을 중심으로 한 중앙을 통치하였다.”(하권, 239쪽)

사실 그랬다. 하느님의 땅 아사달에 터를 잡았던 단군왕검은 위만조선에 의해 쫓겨나고, 점차 한무제와 부여왕 해부루, 그리고 금와에 의해 번갈아 가며 침략을 당한다. 더욱이 해부루는 자신이 단군의 대통을 이어 받았다고 큰소리를 치며 모든 예맥 조선의 맹주로 군림한다.

하지만 단군의 적통을 이어 받은 해모수는 그저 숨죽이듯 지내지 만은 않았다. 그는 개마국 왕 하백의 딸 유화를 통해 ‘추모(주몽)’를 낳는다. 물론 유화가 추모를 가졌을 때는 이미 금와 왕의 첩으로 들어간 뒤였다. 그런데 금와 왕에게는 마씨 저씨 구씨 등 다섯 명의 부인으로부터 이미 일곱 명의 아들이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유화와 추모는 다른 부인들과 왕자들에게 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추모가 태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추모는 궁궐 밖으로 내침을 당한다. 궁궐내의 암투 관계로 인한 불상사였다. 그로부터 그는 20년 간 곳곳을 떠돌아다닌다. 물론 그 길목에는 해모수의 가르침을 받은 선비들이 버팀목이 되어 지켜준다. 또한 몇 몇 선비들은 그에게 칼과 무예와 활 쏘는 법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여러 선비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는데 그들 모두는 추모와 함께 ‘으뜸 고을’, ‘솟고을’이란 뜻의 고구려(高句麗)를 세우는 혁혁한 공로자들이 된다.

추모가 버려진 뒤 20년이 지날 무렵, 금와 왕은 자신의 후계자를 뽑는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연다. 당연히 추모는 다른 왕자들을 물리치고 1위에 올라 왕자의 자리를 꾀 찬다. 그리고 곧이어 우가족 옥지 마을의 ‘예린’ 아가씨와 혼사를 치른다. 그런데 추모는 그녀의 미색에 빠진 채 마가와 구가 그리고 저가 등 다른 견제세력들에 대한 경계를 늦춘 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 그로 인해 결국 그는 부여 성을 빼앗기게 되고, 멀리 졸본국까지 도망치게 된다.

하지만 그곳 골승 땅 언저리의 솟고을에 해모수의 가르침을 받은 재사와 마리, 오이, 협보 등과 함께 그는 ‘고구려’를 창건한다. 그리곤 곧바로 졸본성을 점령하여 장악하고, 그 성을 주축으로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말갈족과 비류국, 그리고 부여성과 모든 예맥 족들을 한꺼번에 통일한다. 그들의 기상에 놀란 옥저와 동예마저도 스스로 항복한다. 더욱이 예전에 빼앗겼던 송화강 인근 유역의 모든 땅까지도 되찾는 기틀을 마련한다.

그런데 고구려를 세운지 19년 만인 기원전 18년 음력 9월, 추모는 마지막 남은 숨을 거둔다. 물론 그가 못다 이룬 뜻은 그의 뒤를 이은 적통 유리왕에 의해 완성하게 된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추모는 잠깐 정신을 차리는 듯 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유리와 예씨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유리에게는 자신이 못다 이룬 소명, 예맥 조선을 반드시 통일하라는 말을 힘겹게 남겼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문을 잇지 못했다. 추모는 우리 민족사에 커다란 초석을 놓고 짧은 생을 마쳤다.”(하권, 314쪽)

그렇듯 이 책은 단군의 적통 후예인 주몽의 탄생과 성장, 그를 주축으로 한 재사와 마리, 오이, 협보 등과 함께 세운 솟고을 고구려의 건국, 그것을 발판으로 무력과 회유책을 동원하여 선조 대에 잃어버렸던 옛 영토들을 하나씩 하나씩 수복하고 통합해 가는, 그 통일대업의 완성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고구려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있다. 이를테면 고구려를 세우는데 누가 가장 큰 공헌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핵심인물인 주몽과 그를 도운 여러 참모들을 빼 놓을 순 없다. 하지만 졸본성의 맹주였던 소서노가 없었다면 결코 그 큰 대업은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졸본성의 모든 상권을 쥐고 있는 그녀와의 정략적인 혼인으로 인한 그녀의 전쟁물자 지원은 주몽이 고구려를 확장해 가는데 지대한 힘이 됐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어색한 점도 없지 않았다. 이른바 순혈주의 강조에 따른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해모수와 주몽으로 이어지는 순혈주의를 내세운 나머지, 이 책 곳곳에 배치된 해모수의 계략과 그의 가르침을 받은 책사와 무사들은 주몽의 고구려 건국에 조력자가 아닌 자칫 주동자로서의 위치를 갖게 한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주몽의 자구적인 노력에 의한 왕좌보다는 해모수가 깔아 놓은 멍석이 왠지 더 커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10여 년 넘게 사료를 살펴보고 직접 땅도 되밟아 보며 철저한 고증과 집요한 해석으로 난생신화에 가린 주몽을 역사적인 실제 인물로 우뚝 서게 한 박혁문의 노력은 두고두고 가치 있을 것이다.

가뜩이나 독도문제를 들먹이며 억지주장을 펴고 있는 일본의 신군국주의나 동북공정의 끈을 더 단단하게 동여매려는 중국의 신중화사상이 우리나라의 정통 역사를 뒤흔들려고 하는 때에 〈정설 주몽〉의 가치는 그야말로 예맥조선을 통일하고 한사군까지 몰아냈던 고구려의 그 옛 기상을 그대로 보는 것과 맞먹을 것이다.

주몽 - 전2권 세트

박혁문 지음, 늘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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