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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속의 산딸기
깊은 산속의 산딸기 ⓒ 박도
달콤새콤한 산딸기

산촌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 서생을 위해 옛 동료가 먼 길을 찾아왔다. 그야말로 "벗이 먼 곳에서 찾아왔다면 매우 즐겁지 않겠는가?"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절감케 하는 기쁨이었다. 차를 한 잔 마신 뒤, 초여름 6월의 초록잔치를 누리고자 전재 숲으로 들어가니 새빨간 산딸기가 수줍게 맞아주었다.

자작나무 숲속의 미술관
자작나무 숲속의 미술관 ⓒ 박도
달콤새콤한, 한창 흐드러지게 무르익은 여인의 젖꼭지같이 탐스러운 산딸기를 실컷 따먹고는, 거기서 가까운 자작나무 숲 속의 미술관으로 가서 선우회 회원들의 작품들을 감상했다. 아직도 마음은 청년 탓인지, 새까만 음모를 그대로 드러낸 나부(裸婦)상이 가장 뇌리에 남았다.

옛 동료는 이효석의 고향 봉평 안내를 부탁했다. 영동고속도로 둔내나들목으로 들어가서 장평나들목으로 빠져나와 동이가 허생원을 업고서 건넌 시내를 따라 조금 달리자 한 시간도 안 돼 마침내 봉평이 나왔다.

장판은 잔치 뒤 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주정꾼 욕지거리에 섞여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가 찢어졌다. 장날 저녁은 정해 놓고 계집의 고함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가산기념공원의 이효석 상을 바라보다
가산기념공원의 이효석 상을 바라보다 ⓒ 박도
동이가 충주집을 후리다가 허생원에게 따귀를 맞았던 그 충주집은 자취도 없고 다만 그 자리에는 4층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여름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 있으나, 석유 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그 옛날 왁자지껄했을 봉평 장터는 세월무상을 느낄 정도로 조용하다. 비단 봉평만이 아니다. 산골마저 무슨무슨 마트다, 슈퍼다, 할인매장에게 재래 장터의 상권이 모두 빼앗겨 버렸다. 거기서 가까운 가산공원에서 이효석상을 바라본 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노총각 허생원에게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번의 괴이한 인연!"의 옛 러브호텔인 물방앗간을 찾아갔다.

물방앗간
물방앗간 ⓒ 박도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줏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로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하지만 그때의 그 물방앗간은 아니고 관광객을 위해 새로 꾸며놓은 물방앗간은 겉모양만 흉내 냈을 뿐 옛날의 물방앗간이 아니었다. 그 언저리에는 온갖 음식점으로 어지러웠다. 우리 두 사람은 물방앗간의 에로티시즘을 신나게 이야기하면서 거기서 멀지 않는 이효석의 생가로 갔다. 나는 2년 만에 다시 찾아가는데 언저리가 더 요란하고 생가 옆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한창 들어서고 있었다. 작가의 고향이 널리 알려져서 유명하게 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플라스틱 개량 기와지붕

이효석 생가(2004년)
이효석 생가(2004년) ⓒ 박도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영국의 스트래트퍼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순례지로 유명하다. 인구 2만의 조그마한 마을에 해마다 일백만 이상의 순례자가 찾아온다고 한다. 셰익스피어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고향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셈이다.

최근 우리나라도 뒤늦게나마 이런 작가의 생가나 집필실 보존과 복원문화가 일어나고 있음은 무척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정작 문화보존보다 상업성에 더 치우쳐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그 복원사업이 고증이 안 된 날림 복원임에 뜻있는 사람을 분노케 한다.

이효석 생가 지붕
이효석 생가 지붕 ⓒ 박도
나는 2년 전 이곳을 다녀간 뒤, <오마이뉴스>에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하면서 그 시정을 바란 바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생가 지붕의 기와가 재래의 전통기와가 아니고 플라스틱 개량 기와라서 나그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것이다. 기왕 생가를 기념물로 일반에게 공개한다면 더 철저히 고증해 그 무렵의 생가로 재현하였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생가와 어울리지 않는 기와지붕은 옥에 티였다. 이효석의 생가라면 유족들이 매입해 관리할 수 없다면 평창군이라도 군 단위 문화재로 관리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다시 찾은 생가나 생가 지붕은 2년 전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다만 생가 들머리에는 상업성 건물들이 비온 뒤 죽순처럼 세워지고, 생가 바로 곁에도 관리 동인지 새로운 건물을 한창 짓고 있었다.

평창군에도 봉평면에도 문화에 까막눈만 모여 있는지? 이효석이 태어나던 1907년 그 시절에 플라스틱 기와지붕이 우리나라 어디에라도 있었는지 묻고 싶다. 마치 영화촬영 세트장에 온 느낌이었다. 내가 생가에 머무는 동안 마침 어느 교회에서 단체로 30여 명이 교회버스를 타고 와서 둘러보았다. 그분들도 모두 생가의 지붕을 보고는 여기까지 찾아온 차비가 아깝다고 한 마디씩 했다.

윤동주의 고향집
윤동주의 고향집 ⓒ 박도
인솔자인 듯한 분은 차마 필설로 옮겨놓을 수 없는 독설을 뿜고서는 차에 올랐다. 나 역시 몹시 씁쓸한 나들이였다. 철저한 고증으로 좀 제대로 생가를 복원시켜놓고 내 고장을 자랑하고 손님을 불러 모으라고 평창군 군수와 관계자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가산 이효석은 가장 위대한 작가 중에 한 분이다. 평창의 보배일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보배다. 이제는 문화재를 좀 제대로 복원하라. 평창 봉평의 관계자들은 룡정의 윤동주 생가에 꼭 한번 가 보시라.

"손 안 대고 코 풀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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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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