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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초상화
정조의 초상화 ⓒ 김정봉

사실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개혁은 미완성인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에 따른 역풍은 개혁을 하지 않은 편이 나았을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역사는 흐르고 잠시 후퇴도 있다. 200여 년의 역사 흐름 속에 그의 개혁의지는 살아 꿈틀대고 있다.

건릉 가는 길, 상수리 나무가 정조의 개혁의지를 나타내기라도 하듯 꼿꼿이 서있다
건릉 가는 길, 상수리 나무가 정조의 개혁의지를 나타내기라도 하듯 꼿꼿이 서있다 ⓒ 김정봉

정조가 집권할 당시 누구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아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물론 홍국영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목숨을 지켜 주긴 했어도 개혁을 실행에 옮길 만한 힘은 되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그러면서도 꾸준히 추진한 것이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주체세력을 양성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민심을 끌어들여 백성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중요성이나 시간상으로 우선순위가 있다기보다는 동시적으로 실행된 것이고 민심을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개혁 정책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주체세력의 양성은 규장각의 건립과 친위부대라 할 수 있는 장용영의 설치로 나타난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권력 다툼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력은 정조를 두려운 존재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집권 초기에 정조에 대한 세 차례에 걸친 암살시도는 그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암살 방법이 노골적이고 은밀하지도 않아 왕에게 대놓고 대드는 형국이었다. 정조는 자기 세력을 키우는 한편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정조가 집권하자마자 자기세력을 만들고 왕권강화를 위한 일에 착수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규장각은 이러한 생각이 집약되어 건립된 것이다.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조의 인물을 길러내며 개혁을 착수하기 위한 혁신정치의 중추기관이었다.

개혁의 꿈이 서려 있는 규장각, 위층은 주합루, 아래층이 규장각이다
개혁의 꿈이 서려 있는 규장각, 위층은 주합루, 아래층이 규장각이다 ⓒ 김정봉

규장각 운영체제에서 개혁적인 면이 엿보인다. 젊고 당색에 자유로운 인물과 서자 출신의 똑똑한 인물들이 등용되었다. 특히 정조 말년까지 138명이 배출된 중견 관료인 초계문신은 정조의 개혁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데 이가환, 서유구, 정약용이 대표적 인물이다.

정조는 규장각 건립과 함께 친위부대인 장용영 설치를 추진하였다. 정조 실록에 따르면 장용영 설치를 두고 "호위를 하려는 것도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될 날이 올 것이다"라 하였다. 왕권 강화와 개혁 정치로 내몰린 기득권 층의 반발과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친위부대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세력을 길러내는 노력과 함께 민심을 끌어안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개혁적 성향을 가진 인물 혹은 자신의 측근을 적극적으로 지방관으로 내보내 지방 사대부를 견제하는 한편 백성의 고통을 풀어주려 하였다. 다시 자신이 키운 인물을 중심으로 암행어사를 지방에 파견하여 수령을 감시, 감독하게 하였다. 수령과 암행어사를 동시에 자신의 손아귀에 쥐어 왕권을 강화해 나아가는 한편 백성에 다가서려 하였다.

또한 수령과 암행어사의 주요 일 중의 하나가 백성의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었고 행찻길이나 능행길에서 백성의 소리를 직집 들으려 하는 등 백성과의 언로를 다방면으로 열어 놓았다.

서얼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고 노비가 도망가더라도 다시 잡아들이는 노비추세법을 폐지하는 한편 금난전권을 혁파하여 중소 상인과 영세 자영업자의 자생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해통공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런 일련의 정책은 양반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상인 등 중인의 세력이 커지는 신분 변화에 따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통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정권이 안정되어갈 즈음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대외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표명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하나는 양주군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옮기는 작업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개혁을 이루어 가고 결국 정치적 공간의 이전까지 꾀하는 목적으로 수원화성을 건립하는 것이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묘호를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바꾸고 존호를 장헌이라 추상하는 등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근본적으로 효행의 일환이라 하지만 기저에는 역적으로 몰린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묘를 화성으로 옮기면서 묘호를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바꾸고 곧 이어 능호를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정조는 한해에 몇 차례씩 능행길에 올라 자신의 효심을 대외에 드러내는 한편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는 정치를 한다.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들음으로써 민심을 끌어안으려는 노력이었다.

가장 대규모로 기획된 능행은 1795년 윤2월9일부터 17일까지 8일 동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거행되었다. 명분은 회갑연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굴레에서 확실하게 벗어나 정통성을 확보하고 수원화성에 대한 위용을 드러내 새로운 정치적 공간, 즉 개혁을 추진하는 개혁적 공간임을 암시하여 개혁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사도세자의 처벌을 적극 주장하여 결국 죽음으로 몰아간 김상로의 묘가 과천에 있다 하여 정조는 과천 길을 피하고 안양, 수원 길을 능행길로 잡는다. 지금 이 길은 너무나도 큰 길이 뚫려 예전의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데 정조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안양의 만안교는 이 때 세워진 것으로 조선 후기 대표적인 홍예교이다. 정조의 융릉 참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나 지금은 실생활에 이용되는 아름다운 다리다. 몇 년 전에 쓰여진 책을 보면 만안교 밑으로 흐르는 물이 더럽고 탁하다 하였지만 지금은 비교적 깨끗한 물이 흘러 기분을 좋게 한다.

만안교, 정조의 융릉 참배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실생활에 이용되는 아름다운 다리다.
만안교, 정조의 융릉 참배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실생활에 이용되는 아름다운 다리다. ⓒ 김정봉

의왕에서 수원으로 가자면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이 고개를 지지대 고개로 부른다. 큰 길 옆 언덕엔 정조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지지대비가 남아 있다. 지지대는 공자가 노나라를 떠날 때 '지지오행야(遲遲吾行也)'라 한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참배를 하러 가는 길이 더디다 하여 붙여졌다 한다.

지지대 고개에 세워진 지지대비, 길 건너편에 효행기념관이 세워지고 이 고개 밑으로 노송지대가 자리하고 있어 정조의 자취를 느껴 볼 수 있다
지지대 고개에 세워진 지지대비, 길 건너편에 효행기념관이 세워지고 이 고개 밑으로 노송지대가 자리하고 있어 정조의 자취를 느껴 볼 수 있다 ⓒ 김정봉

이 지지대 고개를 시작으로 예전 경수로(京水路)를 따라 10여리에는 노송(老松)이 자라고 있다. 정조의 지시로 500그루가 심어졌는데 지금은 130여 그루만 남아 있다. 그 중 비교적 잘 자라고 있는 지구를 노송지대라 하여 보호되고 있다.

정조는 용주사를 크게 다시 짓고 융릉의 원찰로 삼아 아버지의 능을 수호하고 명복을 빌었다. 용주사는 불교가 정치적으로 억압을 당하던 시기에 국가적 관심 속에 세워졌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조선전기에는 왕실의 원찰이 간혹 세워진 예가 있긴 하지만 후기에 와서는 원찰이 세워지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궁전의 건물처럼 돌기둥으로 되어 있는 천보루 밑에서 본 용주사 대웅보전
궁전의 건물처럼 돌기둥으로 되어 있는 천보루 밑에서 본 용주사 대웅보전 ⓒ 김정봉

용주사는 왕실의 원찰 답게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거대한 화강암을 잘 다듬어 세운 천보루의 기둥이다. 돌로 만든 기둥은 주로 궁궐 건축에 사용되는 것으로 왕실의 후원아래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의 소맷돌의 장식도 태극무늬와 구름·모란 무늬가 새겨 있어 다른 절과 다르다.

당대에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김홍도는 정조가 하사한 '부모은중경'을 그렸고 김홍도의 감독 아래 대웅전의 후불탱화를 제작했다. 또한 정조는 김홍도가 그린 4폭의 병풍을 하사하여 용주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결정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 수원화성의 건립이다. 화성 건립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서울 양반 중심의 붕당정치를 극복하고 재야 선비 백성의 자율성과 정치참여도를 높여 주는 새로운 정치구조 창출의 하나'라는 견해와 함께 '급격한 도시적 발전이라는 전면적 사회변동기에 직면해 도시적 발전을 수도권 지역으로 확대함으로써 왕권 강화와 왕조의 중흥을 도모하기 위해 추진된 국가적 사업'이라는 견해가 있다.

불타기 전의 서장대의 모습, 팔달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04년 7월에 촬영)
불타기 전의 서장대의 모습, 팔달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04년 7월에 촬영) ⓒ 김정봉

또한 '끈질긴 기득세력과 반대파를 몰아 내는 방법으로 그들의 근거지를 뿌리뽑고 약화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하며 수원화성으로의 천도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는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한 견해도 있다.

수원화성은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로 꼽힐 만큼 아름답기까지 하다
수원화성은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로 꼽힐 만큼 아름답기까지 하다 ⓒ 김정봉

화성은 단순히 효의 상징물이 아닌 개혁을 위한 새로운 공간이며 정조가 새로운 세력과 함께 개혁을 펼쳐 갈 정치적 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화성행궁에는 정조가 앞날을 내다보며 그의 의지를 담은 건물이 있다. 노래당(老來堂)이다. 노래당은 "늙어서 와 살 집"이라는 뜻으로 수원화성에 대한 정조의 속뜻을 가늠할 수 있다.

'늙어서 와 살 집'이란 의미의 노래당은 정조의 숨은 뜻이 있다
'늙어서 와 살 집'이란 의미의 노래당은 정조의 숨은 뜻이 있다 ⓒ 김정봉

정조는 수원화성을 개혁의 완성을 꿈꾼 공간으로 남겨 둔 채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 정조의 개혁이 완성되기까지 세상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독살에 의한 것이든, 병에 의한 것이든 세상은 정조의 개혁을 받아들여 주질 않았다.

건릉,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건릉,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 김정봉

지금은 미완의 개혁을 후세에 남긴 채 정조는 아버지 옆에 누워 있다. 건릉 주변에 곧게 자라고 있는 상수리 나무는 그의 개혁의지를 담은 듯 굽지 않고 곧게 뻗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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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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