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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하는 아이들
응원하는 아이들 ⓒ 안준철
초여름 땡볕이 내려 쬐는 학교 교정에서 이틀동안 교내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여학생 농구 심판을 보느라 몸이 녹초가 되고 말았지만 마음만은 벅찬 행복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말만한 여자애들이 공을 먼저 잡으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지요. 몸싸움이 격렬해질수록 엉겨붙은 아이들을 뜯어말리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시합에 몰두해 있는 아이들의 타는 눈빛과 뜨거운 몸짓에서 젊음의 에너지를 충분히 수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체육대회 이틀째인 오늘은 사진기를 들고 응원석에 앉아 1학년 남학생 축구 결승전을 관전했습니다. 월드컵 개막을 얼마 남겨두지 않아서 그런지 남학생들의 축구 경기를 구경하거나 응원을 하는 아이들의 눈빛에서도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축구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선수들의 한 동작 한 동작에 긴장어린 눈길을 주고 있었지만 그런 재미와는 또 다른 감회가 마음 한 구석에서 조용히 솟구치고 있었습니다.

저 집중력!
저 집중력! ⓒ 안준철
수업시간마다 이름을 불러주고 눈을 맞추었던 아이들. 벌써 만난지 3개월이 지났으니 눈을 마주친 횟수도 상당하겠네요. 요즘은 이름을 부르면 'Yes, sir'이나 'Here' 같은 대답 대신 영어 문장으로 응수를 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짧은 대화가 이루어지지요. 가령, 이런 식입니다.

"김아무개"
"l love you."
"Thank you very much! Ilove you so much, too."

"이아무개"
"How are you doing?"
"Very well. Thank you, and you?"
"I'm fine, too."

가끔은 이런 쉽고 간단한 문장보다는 뭔가 도전 정신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가 짧은 것이 문제지요.

"정아무개"
"마이 브라더(My brother) 고우(go) 군대. 그래서 아이(I) 슬퍼요."
"Oh! Your brother went to the army?(형이 군대를 갔다고?) So you feel sad?(그래서 네가 슬프다고?) Repeat after me.(따라서 해봐.) My brother went to the army, so I feel sad."

슛- 골인
슛- 골인 ⓒ 안준철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저만 못합니다. 사실은 그 정도가 아니라 고등학생으로서 기초가 턱없이 부족한 아이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도 영어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수업 첫날 저와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고 약속을 했고, 아이들은 영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지요. 그것도 공책 첫 장에 적게 했으니 꼼짝없이 약속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가끔 쪽지상담을 해보면 고맙게도 영어가 좋아졌다는 아이들이 많아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 한 골 먹었네! 공이 그물 안에 있다 .
어, 한 골 먹었네! 공이 그물 안에 있다 . ⓒ 안준철
영어는 제가 아이들보다 잘하지만 축구실력은 어림도 없습니다.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아이가 있다면 현란한 드리볼 기술을 가진 아이입니다. 솔직히 저는 패스는 그럭저럭 하는 편이지만 워낙 발재간이 없다보니 공을 몰고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누군가 저를 향해서 돌진해오면 그만 눈앞이 캄캄해지고 맙니다. 아무리 잘해보려고 해도 저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발재간이 눈부신 아이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다 못해 존경스럽기까지 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그들은 나의 작은 영웅들입니다.

응원석에서 포즈를 잡은 남학생들
응원석에서 포즈를 잡은 남학생들 ⓒ 안준철
해마다 교내 체육대회가 끝나면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곤 했습니다. 영어 실력으로 치자면 거의 바닥 수준인 아이라도 현란한 개인기를 뽐내면서 운동장을 누비고 난 뒤에는 그 아이가 달라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학교에 아이들을 재는 잣대가 좀더 다양해지고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어린 꿈나무들이 무엇으로든 자기 가치를 드러내고 그것을 즐기고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보다 많은 기회를 제공해야할 의무가 학교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저 간절한 눈빛으로 누구를 응원하고 있을까?
저 간절한 눈빛으로 누구를 응원하고 있을까? ⓒ 안준철
인간의 존재 가치를 오로지 학과 성적 하나로 재려하는 너무도 편협하고 비인간적인 악습이 갈수록 심화되어가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불행의 질주를 막아주는 역할을 할만한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것도 슬픈 현실입니다. 어른들도 일만하고 살지는 않듯이 학생들에게도 방과 후에 여가를 선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말입니다.

승부차기
승부차기 ⓒ 안준철
오늘 축구시합은 전후반 4-4로 끝나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서야 결판이 났습니다. 그러니 선수들은 선수들대로 응원하는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열기가 뜨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응원석에 앉아 줌 기능을 최대치로 해놓고 사진기에 그 뜨거운 열기를 담아보려고 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아이들에게 보여줄 생각이었지요.

그 열기를 몰아 공부도 열심히 하자? 이런 말을 꼭 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눈부신 활약을 기뻐하고 감동하는 교사의 긍정어린 눈빛, 그것이면 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도 기회는 꼭 오기 마련이니까요. 아이에 대한 신뢰와 관심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정말 사랑은 운동력이 있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오늘의 MVP, 골키퍼의 수줍은 미소 -승부차기를 무려 두 개나 막았다.
오늘의 MVP, 골키퍼의 수줍은 미소 -승부차기를 무려 두 개나 막았다. ⓒ 안준철
우리가 월드컵을 즐기듯이 아이들도 나름대로 그들의 삶을 건강하게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축구나 농구와 같은 스포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른(특히 남자)들의 삶의 양상이 상당히 달라졌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좋지 않은 쪽으로 말이지요.

아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광장을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음침한 밀실로 달려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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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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