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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천국의 시적 주술> 표지
<진흙 천국의 시적 주술> 표지 ⓒ 문학동네
최동호는 <진흙 천국의 시적 주술>이란 책에서 시의 현재적 가치를 '시의 인간적인 측면'에 둔다. 그리하여 시의 상실은 인간적 가치의 상실로 본다. 왜 그렇게 본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한 편의 시를 쓰고 읽는다는 것은 그 자신이 속한 사회와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삶을 보듬고 매만지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적 진실을 드러내고 찾아내려 하는 행위가 바로 시 쓰기이고 시 읽기인 까닭일 것이다.

시인이 사라진다면, 인간의 인간에 대한 각성도 사라질 것이며,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문학의 위기와 인간의 위기' 중에서)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면 오히려 시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지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시적인 것이란 인간적인 것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지요. ('새천년을 여는 20세기 한국시' 중에서)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문학의 가치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문학 외적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문학적 관심은 점점 약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이러한 문학의 위기를 교육 현장에서 보고한다. 그러면서 그 원인을 '컴퓨터나 인터넷 그리고 생명공학의 발전과 확산'에서 찾고 있고 '활자문화에서 전파매체로의 변화'에서 찾고 있다.

더불어 요즘의 젊은이들의 '체험 결여'를 지적한다. 그로부터 시 쓰기가 소원시되고 시 읽기가 요원시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제반 요인들로 인하여 시의 독자들이 떠나갔거나 떠나가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 편의 시나 소설을 쓰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동시에 한 편의 시나 소설을 읽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학생들에게 왜 시를 쓰기가 어려운지 물으면 그들은 쓸 내용이 없다고 한다. 시를 쓸 수 있는 체험이 결여된 탓이다. 체험 없는 소설은 SF적 상상력 주변을 배회하게 되겠지만, 체험 없는 시는 증류수와 같은 언어를 조작할 뿐이다. ('시의 독자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 중에서)

그럼 이때의 체험은 어떤 것들을 말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자연체험, 현장체험, 역사체험, 사회체험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지나친 우려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의 젊은이들이라고 하여 모두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고 좁은 활동 반경 속에서만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들만의 영역에서 나름의 시적 체험들(온오프라인을 포괄한)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치열했던 시대의 역사 체험, 현장 체험은 아닐지라도 나름의 사회 체험, 개개인이 속한 곳에서의 현장 체험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음의 사례는 부정적 일례로 든 것 같기도 하고 젊은이들의 감성 변화의 일례로 든 것 같기도 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역으로 긍정적이거나 새로운 측면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저자는 대학 강단에서의 현장 경험 내용을 제시한다. 이야기인즉슨 한 편의 시에 대한 세대간 반응의 차이를 단적인 사례로 들려준 것이다.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 대한 1990년대 학생들과 2000년대 학생들의 반응이 엇갈리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1990년대 학생들이 '비판적'인 데 반하여 2000년대 근자의 학생들은 '공감적'인 반응을 보이더라는 것이다.

리얼리즘 문학론이 붕괴되고 해체시와 정신주의가 충돌하던 1990년대 중반에 이 시에 대한 학생들의 견해는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 의외로 2000년대 초의 학생들은 이 시에서 그들 나름의 시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 최근의 학생들이 이 작품에 공감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현실적일 수 있다는 그들의 감각 때문이었다. (…) 그것은 그만큼 인터넷의 가상현실 속에서 그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시의 독자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 중에서)


'인터넷의 가상현실 속에서 그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에 주목해 보자. 필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여 본다. 그것은 여전히 '시적 체험'의 문제이다. 과거와 지금 굳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적 체험의 방식'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영상세대는 특히 10대나 20대는 인쇄 매체보다 영상 매체에 더 익숙하다. 펜보다는 마우스나 키보드에, 활자보다는 화면에 더 친숙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들의 시 쓰기나 시 읽기의 방식도 적어도 조금은 달라지거나 추가된(영상세대라고 해서 기존의 시 읽기나 시 쓰기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것이 아닐까?

지금은 웹에서 제공하는 각종 정보의 용이한 검색과 활용으로 시를 감상하는 과정이 오히려 기존의 시 읽기 방식보다 좀더 명증하게 다가올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박목월의 시 '청노루'를 감상하면서 미체험 또는 체험 부족(자연체험 농촌체험 역사체험 결여 등)으로 인하여 잘 모를 경우 '기와집'을 찾아보고 '느릅나무'를 찾아보고 '노루'를 찾아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곧바로 이미지가 줄줄이 뜰 것이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관련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최동호 평론가
최동호 평론가 ⓒ 문학동네
1948년 수원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76년 시집 <황사바람>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 <아침책상> <딱따구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공놀이하는 달마>, 시론집 <현대시의 정신사> <불확정시대의 문학> <한국현대시의 의식현상학적 연구> <평정의 시학을 위하여> <삶의 깊이와 시적 상상> <하나의 도에 이르는 시학> <디지털 문화와 생태시학> <현대시사의 감각> 등이 있다. 인쇄 매체에서의 시 감상은 어떠한가? 검은 줄로 그어진 시행을 따라 읽어가는 방식이다. 이미지도 없고 소리도 찾을 길 없다. 오로지 독자 자신의 체험이나 상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간혹 삽화나 그림이 곁들여지기는 하나 그뿐이다. 이러한 맹숭맹숭한(?) 텍스트가 독자의 시적 상상을 극대화한다고는 하나 그것을 증명할 방법 또한 쉽게 찾을 수는 없다. 냉정히 말해서 시적 체험의 영역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시적 체험의 영역만 놓고 보았을 때는 지금이 훨씬 더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요즘 젊은이들 혹은 사람들은 정말 시를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것일까? 필자는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여전히 시는 읽히고 있고 또 쓰여지고 있다고 본다.

실제로 오프라인에서는 다양한 시 모임들을 가지고 있고 온라인에서는 무수한 문학 사이트들이, 또 수많은 개인 혹은 소모임 형태의 클럽들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변한 것이 있다면 기호가 다소간 바뀌었을 따름이다. 환경의 변화와 함께 입맛이 변했을 따름이다. 이러한 입맛의 변화가 다시 예전의 맛을 그리게 될지, 더욱 강렬한 맛을 요구하게 될지, 색다른 맛을 요구하게 될지, 골고루 알맞게 요구하게 될지는 꾸준히 지켜보면서 연구해야 할 일이다.

필자의 생각과 저자의 우려 섞인 생각은 충돌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의 미래를 어둡게만 보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일치하는 듯도 싶다. 특히 저자의 현 문학교육에 대한 우려와 반성과 대안 제시는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문학교육은 당장에 환산되는 실용적 가치교육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다양한 충동들을 종합하고 고양시켜서 지고한 것을 택하게 만드는 먼 미래의 역사 지평에 대한 투자이자 가치 부여입니다. ('현대의 사회 변화와 문학교육의 의의' 중에서)

진흙 천국의 詩적 주술

최동호 지음, 문학동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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