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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원
그녀가 오고 있다. 그녀는 지금 군자를 지났다. 그녀가 군자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보낸 문자에 실려 내게 날아든다. 아마도 그녀는 군자를 멀리 벗어나기 전에 문자를 보내기 위해 손가락을 황급하게 놀렸을 것이 분명하며, 그 민첩한 손가락의 움직임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은 문자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내게 도달하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하여 그녀의 문자가 내게 날아든다. 문구는 짤막하다.

“지금 군자 지났어.”

그러나 그 문구는 내게는 문자가 아니라 속삭임이다. 때문에 내가 핸드폰의 액정 화면을 열어 그 문자를 보는 순간, 그 문자는 화면을 뛰쳐나와 내 귓전으로 날아오르며, 그 다음엔 언제나 예외없이 이렇게 속삭인다.

“그녀를 마중나갈 시간이야.”

그러면 그 순간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의 전부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지우는 일! 세상에서 소리를 모두 지웠을 때를 한번 상상해 보시라. 사람들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부터 그저 입을 뻥긋거리기 시작한다. 혹시 때가 선거철이라면 몇 번의 기호에 덧붙여 출마자의 이름을 외치며 반복적으로 허리를 굽히는 선거운동원의 몸짓에서도 소리가 지워진다. 그러면 그들의 몸짓은 반복된 동작에 묶여버린 움직이는 인형을 연상시키고 만다.

자동차는 또 어떤가. 자동차는 빠르지만 그것의 빠른 속도감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자동차의 시끄럽고 위협적인 소음이다. 자동차에서 소리를 지워 입에 재갈을 물리는 순간 자동차는 빠르게 움직여도 마치 느린 화면을 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면서 속도감을 급격히 잃어버린다. 소리를 지워버리면 세상의 느낌은 그렇게 완연하게 달라지고 만다.

세상의 느낌이 그렇게 달라지더라도 그녀를 마중나갈 때 내가 해야 할 일의 전부는 바로 세상에서 소리를 모두 지워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세상에서 소리를 지운단 말인가. 그 방법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MP3 플레이어를 집어 든 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것을 틀기만 하면 된다. 물론 볼륨은 좀 높여야 할 것이다. 또 음악은 발라드풍의 곡보다 락이 좋다. 굳이 예를 들자면 마야의 '고래사냥'과 같은 곡이 딱이다.

그러면 음악이 세상의 소리를 한순간에 깨끗이 지워준다. 그러나 세상의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며, 또 자신들 입에 재갈을 물렸다고 불평을 하거나 항의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안심하고 음악으로 세상의 소리를 지워도 된다.

혹 그녀를 맞으러 지하철로 가는 동안 거리에 비가 내리고 있다면, 그리고 그녀를 마중나가는 그 길에서 세상의 소리를 모두 지워버렸다면, 세상은 이제 비에 젖는 것이 아니라 온통 음악에 젖는다. 빗소리는 지워지고 그 자리를 음악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렇게 나는 음악으로 세상의 소리를 모두 지우고, 그리고 그녀를 맞기 위해 지하철로 들어선다.

물론 지하철 속의 모든 소리도 음악이 깨끗이 지워서 텅 비워놓는다. 그 텅빈 지하철 속엔 이젠 음악뿐이다. 나는 그녀가 오는 지하철의 모든 소리를 지우고 그렇게 음악으로 지하철을 채워놓는다. 그녀를 맞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준비의 전부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제 통로쪽 난간 앞에 몸을 세우고 그녀가 걸어나올 통로쪽을 바라보며 그녀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소리를 지우기 전엔 "띨릴리"거리는 신호음에 이어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그러면 그녀가 탄 지하철이 도착한다. 그러나 그 소리를 모두 음악에 묻어버리면 띨릴리거리는 신호음도, 또 지하철의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도 모두가 지워진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그것은 바람이 알려준다. 미세한 바람이 이마를 살짝 밀면 그건 그녀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예고이다. 바람은 점점 더 세기를 더하며, 결국은 내 머리칼을 날릴 정도로 강해진다. 그러다 갑자기 바람이 그 호흡을 멈춘다. 그럼 그녀가 도착한 것이다.

내가 음악으로 세상의 소리를 모두 지우고 그녀를 맞으면 그녀는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는 법이 없다. 소리가 지워진 나의 세상에선 매일 저녁 바람이 그녀를 실어다 내게 건네준다. 그리고 통로쪽에서 드디어 바람이 실어다준 그녀가 나타난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므로, 그녀는 지하철을 타고 하루의 직장일에 지친 피곤한 퇴근길을 오는 법이 없다. 아니, 난 그녀를 사랑하므로, 그녀가 피곤한 지하철의 퇴근길을 오도록 방치할 수가 없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녀는 바람이 실어다 내게 건네준다.

그녀를 싣고 온 바람에게서 그녀를 건네받은 뒤엔 소리를 지워버렸던 텅빈 지하철에 다시 소리를 돌려준다. 이제 세상의 소리를 지우고 그 자리를 가득 채웠던 음악의 자리엔 그녀의 하루 얘기가 있다. 나는 매일매일 그렇게 음악으로 세상의 소리를 지우며 그녀를 마중나간다. 그러면 바람이 그녀를 실어다 준다. 그리고 그 다음엔 이런저런 그녀의 하루 얘기로 나를 채우며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오늘도, 내일도 이제 나는 그녀를 마중나갈 때면 항상 바람으로부터 그녀를 건네 받을 테다.

ⓒ 김동원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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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갖고 돌아다니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때마다 사진을 찍고 그들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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