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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0 장 마지막 승부(勝負)

방백린은 섭장천이 자리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수가 놓인 금빛 장포를 걸쳤는데 그것은 황제나 입는 황룡포(黃龍袍) 같았다. 양어깨와 가슴에 둥그렇게 용을 형상화한 자수가 놓여져 있어 매우 공들여 만든 것으로 보였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유항을 비롯한 대군 등 일행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앞으로 모으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으며 그것은 군신의 예에서 신하로서 주군에게 보이는 태도가 분명했다. 더구나 그는 섭장천을 보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단지 고개만 까딱했을 뿐이었다.

“이미 황제라도 된 것 같은 태도로 구만....”

섭장천의 눈에서도 미세한 노기가 스쳤다. 허나 정작 섭장천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더 이상 참다못한 백결이 냉소를 터트리며 말을 던졌다. 백결의 말에 우상이 날카롭게 쏘아보며 살기 띤 음성을 뱉었다.

“말을 삼가라. 감히 네 놈 따위가 능멸할 존체(尊體)가 아니시다.”

당장이라도 백결을 공격할 태세였다. 이미 두 번이나 당한 백결은 흠칫 했으나 오히려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손을 쓸 테면 써보라는 태도다. 백결은 우상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자 방백린이 오른 손을 들어 잠시 제재를 하고는 섭장천 일행을 둘러보며 느긋한 미소를 띠었다. 그것은 어쨌든 간에 아랫사람을 너그럽게 봐준다는 태도였다.

“하여튼 이런 자리에 스스로 찾아와 주어 다행이오.”

방백린의 시선은 섭장천 일행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 섭장천을 바라보는 눈길은 약간 짜증도 섞인 듯 했지만 장철궁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약간의 미안한 감정도 섞여 있었다. 또한 백결을 보는 눈에는 미세한 살기와 노여움이, 등자후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담겨있었다.

“저들과 승부를 본 후 우리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어떻소?”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이 아주 다행이라는 듯한 말투였다. 더구나 앓던 이가 빠진 듯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태도였다. 장철궁이 갑자기 대소를 터트렸다.

“핫핫.... 이 우형을 밀어내고 나니 이 세상이 네 것으로 보이더냐?”

의외였다. 장철궁은 화를 내지 않았다. 내용은 그러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과거와 같이 사제를 대하는 듯한 친근한 말투였다. 한편으로는 어리석은 동생을 타이르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역시 장철궁이었다.

“뭐... 굳이 틀린 말도 아니오.”

방백린은 부인하지 않았다. 사실 이 세상에 자신과 겨룰 수 있는 인물은 오직 하나 장철궁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서보검의 위력에 대해서는 방백린만큼 아는 인물도 드물었다. 다행스럽게 그 예상이 적중했고, 지금 장철궁은 완전치 못한 몸이었다. 그를 바라보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은 것은 사내로서의 정당한 승부가 아닌 당새아를 시켜 요서보검으로 기습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장철궁은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였다.

“무슨 제안이오? 제마척사맹과의 승부가 끝난 다음에 사형이라도 나서겠다는 것이오?”

이미 성치 못한 몸으로 나선들 달라질 것은 없다는 태도다. 그렇다고 섭장천이 나서더라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모습이었다.

“아니..... 세상에는 때로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다. 또한 그래도 우리는 얼마 전까지 서로를 위해주는 사이였는데 칼부림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겠지. 그래서 우리 역시 한 사람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

“네가 원하는 것도 우리를 죽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 믿는다. 우리 역시 네 앞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겠지.”

“맞는 말이오.”

방백린은 고개를 끄떡였다.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라면 과거 한솥밥을 먹었던 사형제를 베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장철궁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저 담천의란 친구와의 승부에 우리 운명을 걸기로 했다. 저 친구와의 승부에서 자네가 이긴다면 우리 역시 천마곡에 갇혀 있겠다.”

정말 뜻밖이었다. 장철궁의 선언은 정작 방백린 뿐 아니라 담천의에게도 경악스런 일이었다. 장철궁 같은 인물이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더구나 섭장천이 있음에도 스스럼없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헌데 섭장천 일행은 이미 이곳에 당도하기 전에 결정을 했는지 전혀 놀라거나 동요되는 기색이 없었다.

방백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조용히 앉아 있는 담천의에게 향했다. 정말 뜻밖의 일이어서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것이다.

(도대체 저 자에게 어떠한 것이 있는 것일까? 사람들을 믿게 할만한 무언가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장철궁은 알 것이다. 아니 섭장천이나 백결, 등자후까지도 알 것이다. 담천의가 아무리 절륜한 무공을 가지고 있더라도 천동의 비학을 익힌 자신에게 반드시 패할 것이란 사실을... 그럼에도 저들이 한 선택은 무슨 의미일까? 정말 저 담천의란 인물이 자신과의 승부에서 일 푼이라도 이길 승산이 있다고 보는 것일까?

“선택이야 마음이지만 아주 불행한 선택을 하셨구려. 하지만 나로서는 오히려 바라던 바이고, 아주 흡족한 결정이오.”

정말이었다. 방백린의 걱정은 제마척사맹이나 담천의가 아니라 오히려 섭장천과 장철궁이었다. 몸이 완전치는 않다고 하나 장철궁을 제압하려면 자신이 나서거나 최소한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모든 것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담천의는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제마척사맹의 군웅들로서도 벅찬 일인데,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제는 저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아마 백결이 제안했을지 모르지만 그들로서도 다른 특별한 대안이 없어 내린 결정이었을지 몰랐다.

“.............!”

담천의는 처음으로 섭장천 일행에게 고개를 까딱하고는 자신이 있을 위치로 걸어가는 방백린을 바라보았다. 먼 거리였지만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기품이 풍겼고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인정할만한 인물이었다.

방백린 역시 다시 담천의를 바라보다가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엉켜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빛에서는 살기가 아닌 상대를 인정한다는 듯한 기색이 흘렀다. 방백린은 담천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방백린은 그들 일행 가운데에 용의 형상을 한 화려한 탁자 앞으로 걸어갔지만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리고 양팔을 약간 들자 유항이 재빨리 그가 입고 있던 황룡포를 벗겨 들었다. 황룡포 안에는 무복으로 보이는 매우 간편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얇은 옷 사이로 탄탄한 가슴근육이 엿보였다.

“시작할까?”

먼 거리였음에도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또렷한 목소리였다. 나직했지만 그곳에 앉아있는 모든 군웅들의 귀에 부담을 주지 않고 파고들었다. 의어전성도 아니고 천리전음도 아니었다. 그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말한 것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군웅들은 또 다시 실망스런 마음과 함께 위축이 되는 것을 느꼈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말을 전하는 정도는 절정고수라면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전음이란 것이 음성을 발출하지 않고 내력으로 전달하는 것인 만큼 숙달된다면 전음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이렇듯 많은 사람들의 귀에 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기 존재하리라곤 상상해 보지 않았다. 잔기술일 뿐이라고 치부하려 애쓰면서도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소주 한 잔할 장소와 일시를 공고합니다. 
5월 마지막 주로 정하려 하다가 모두 바쁘실 것 같아 조금 앞당겼습니다. 미국에 있는 분 중 운 좋게 한국에 나오셔서 참석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계셨고, 다음날 부담도 없을 것 같아 금요일로 잡았습니다. 

일시 : 5월 26일(금) 오후 7:00시 
장소 : 광화문 뒷골목 밥상머리 2층(세종문화회관 뒷편 : TEL 02-723-0288) 

이십여 분 정도가 게시판에 글을 남기고 메일을 주셨습니다. 오히려 외국에 나가 계시는 분들이 메일주시며 참석하지 못해 서운하다고도 하셨습니다. 그 동안 저에게 메일을 주시며 격려하셨던 분들이나 댓글로 성원해 주셨던 분들, 날카롭게 비판하셨던 분들이 모두 참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 동안 조용히 그리고 꾸준하게 읽으셨던 분들도 이번 기회에 한 번 뵈었으면 합니다. 

편하게 나오셔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자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은 없습니다. 흉금 없이 제가 보지 못한 시각에서 본 <단장기>에 대한 평도 듣고 싶은 마음입니다. 물론 메일이나 답글을 주시지 않고 참석하셔도 무방합니다. 

비용은 그 동안 오마이뉴스에서 단장기를 연재하면서 받은 원고료와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셔 주셨던 '좋은 기사 원고료'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의 참석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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