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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란 모들. 양 옆에 모를 기를 수 있는 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잘 자란 모들. 양 옆에 모를 기를 수 있는 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 김현
“야야, 낼 모심는단다. 낼 아침 일찍 오그라잉.”

금요일 밤 8시쯤 어머니한테 걸려온 전화입니다. 토요일 아이들과 무슨 공연을 보러 가기로 일주일 전부터 약속했는데 모를 심는다는 전화 한 통화로 모든 계획이 취소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시골로 향했습니다.

공연 약속이 취소된 것에 대해 불만을 보였던 아들 녀석은 차를 타자 시골에서 무얼 하고 놀지 궁리에 빠집니다. 어린이 날 저녁부터 열을 동반한 목감기에 맥을 못추던 딸아이는 금세 엄마 품에 쓰러져 잠을 잡니다.

모내기를 하러 가지 전 모에 약을 뿌려주고 있는 모습.
모내기를 하러 가지 전 모에 약을 뿌려주고 있는 모습. ⓒ 김현
시골에 도착하자마자 모들이 자라고 있는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머니는 옆에 서 있고 형과 형의 친구가 와서 모가 잘 자란 모판 위에 물을 뿌리고 약을 뿌리고 있습니다.

10여일 전 모판에 볍씨를 뿌렸었는데 푸른 빛깔로 반들반들하니 윤기 나게 잘 자라 있습니다. 손바닥으로 잘 자란 모를 어린아이 머리를 쓰다듬듯 만져보았습니다. 부드러운 감촉이 스미어옵니다. ‘허허 이놈들, 올 핸 속 썩이지 않고 잘 자랐네.’ 혼잣말로 중얼거려 봅니다.

“근데 성이는 어디 갔어요? 안 보이네.”
“어디 가긴. 지금 논에서 욱이 에미랑 모심고 있을끼다. 새벽부텀 나가 모심고 있다.”
“그래요. 근데 엄마! 이번엔 모가 잘 자랐네. 촘촘하고 튼튼허니 잘 났어.”
“말 말그라. 너그 아버지하고 욱이 에미가 매일 물주고 하우스 통풍시켜 주고 그랬응게 그러지 안그랬으면 또 폭싹 갔을텡게.”

어머니의 폭삭 갔다는 말은 작년 모판 작업을 두고 한 말입니다. 작년 동생은 모판 작업을 두 번이나 해야 했습니다. 뭐가 문제인지 모판에서 올라오는 모들이 싹을 틔워 올라오는 중에 하얀 곰팡이가 슬고 어쩌다 잘 자란 것도 못 먹어 부스럼 난 것처럼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어 모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엔 다시 싹을 틔워 모판을 만들어 모내기를 해야 했었습니다.

반들반들하니 잘 자랐습니다.
반들반들하니 잘 자랐습니다. ⓒ 김현
그래서 이번엔 작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해 모판을 집어넣을 기구를 만들어 그곳에 모판을 놓아 모를 길렀습니다. 동생은 그 모판을 넣을 것을 만들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용접봉을 들고 작업을 했습니다.

동생은 농기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은 직접 만듭니다. 비닐하우스는 물론이거니와 몇 년 전엔 벼 건조장도 직접 만들었습니다. 온 식구들이 몇 달을 붙어 일하긴 했지만요. 그렇게 직접 하지 않으면 경제적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동생은 1억이 넘는 농가부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젊다는 사람들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면 대부분 그 정도의 부채를 안고 있다고 합니다.

물을 충분히 뿌려주고 약을 뿌린 모는 트럭이 싣고 논으로 갔습니다. 모 심을 논에 미리 가져다놓아야 곧바로 모를 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논으로 향하는 길, 많은 논들에서 막 심은 듯한 어린 모들이 논 가운데 서서 떨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모를 심기 위해 트랙터로 논갈이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논으로 싣고 갈 모.
논으로 싣고 갈 모. ⓒ 김현
또 논 가운덴 왜가리와 물닭 같은 새들이 먹이를 찾는 모습이 종종 목격됩니다. 논갈이를 하면 땅 속에 있던 미꾸라지나 우렁이들이 밖으로 나오는데 그걸 잡아먹으러 논으로 몰려든 것 같습니다.

녀석들은 트랙터나 이앙기, 트럭이 시끄럽게 오고 가도 별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닙니다. 지들에겐 흔한 풍경으로 인식되나 보다 생각하며 논에 도착하니 모를 심고 있습니다. 아빠를 따라다니길 좋아하는 개구쟁이 선빈이 녀석이 이앙기를 운전하는 지 아빠 옆에 앉아 있다가 큰 아빠를 보자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합니다.

“큰 아빠, 나 모 심었다. 히히.”
“녀석아! 니가 무슨 모를 심어. 아빠 따라다니며 방해나 하지.”
“헤헤헤. 이앙기 타고 아빠 옆에 앉아 있으면 나도 심은 거지 뭐. 그치 아빠?”

ⓒ 김현
그러면서 무슨 대답을 할까 하는 표정으로 지 아빠를 쳐다봅니다. 원하는 대답 대신 모판 내려놓고 큰 아빠 모 가지러 갈 때 집으로 가라는 소리에 심통이 나 입을 삐죽 내밉니다. 그 모습에 잠시 웃음이 납니다.

“근데 더운데 왜 비옷을 입고 있는 거예요?”
“흙 파다가 옷이 찢어져서요. 근데 아주버니 허리 아프다고 하던데 일 해도 괜찮은 거예요?”
“조심해서 하면 괜찮아요. 뭐 아프면 병원 가서 치료받으면 되는 거구.”

제수씨는 이앙기가 지나간 자리의 흙을 갈음하다 바지가 찢어져 비옷을 입었다며 웃습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입니다. 실제 제수씬 농사짓는 인근 마을의 여자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적습니다. 그런데도 힘든 논 일, 밭 일 마다하지 않고 동생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이앙기로 모를 심는 모습
이앙기로 모를 심는 모습 ⓒ 김현
거기에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욱이를 건사해야 하고, 연로하시고 아픈 부모님까지 모시고 살아가려면 몸이 열두 개라도 모자랄 편입니다. 그런데도 큰 불평불만 없이 열심히 사는 모습이 고맙고 그리 예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동네 어르신들이 "나이도 젊은데 뭐 땀시 시골구석에 처박혀 고생한디야, 도시 가서 편하게 살지"하면 제수씬 "아줌니는 그것도 모른다요, 사랑하는 서방님 있응게 살지 왜 살아요"하고 웃고 합니다.

왜 제수씨도 도시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다른 여자들처럼 늘 화장을 하고 놀러 다니고 문화생활도 가끔 누리면서 살고 싶겠지요. 헌데 남편이 농사지으며 산다니까 불평 내지 않고 남편 따라 사는 것이지요.

ⓒ 김현
한 필지 더 심고 나니 오후 1시가 되어갑니다. 옆에서 모판 나르고 하는 사람들이야 뭐 좀 먹기도 하지만 동생은 새참 먹을 시간도 없습니다. 오후에도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쉬엄쉬엄 하다간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수밖에 없습니다. '

집에 와 아내가 미리 차려 놓은 돼지 찌개와 상추쌈으로 점심을 후다닥 먹자마자 곧바로 논으로 향합니다. 10분도 앉아 있을 새가 없습니다. 모처럼 모심는 일을 도와주는 난 피곤이 밀려오지만 쉬자는 말도 못하고 따라 일어섭니다. 논으로 향하면서 트럭 속에서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제까지 심으면 다 심는 거야?”
“낼까지 심고 다시 나락 싹 틔워야 혀.”
“아니 하릿논을 얼마나 얻을 길래 또 해?”
“그렇게라도 해야 기계값이라도 갚는 거지 뭐.”
“그래도 몸 생각해서 해. 넘 무리하게 하지 말고. 욕심 내다가 몸 다치면 아무 소용이 없응게.”

지금 동생이 짓는 농사는 대부분 남의 논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본인의 논도 있지만 자기 논만으로 농사를 지으면 농기계 값도 갚지 못하기 때문에 몇 년 동안은 무리하게 지을 수밖에 없다고 하며 웃습니다.

ⓒ 김현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엔 네 필지의 모를 심고 집에 들어오니 저녁 6시가 다 돼 갑니다. 집에 오자마자 동생은 다음 날 모심을 논갈이를 해야 한다며 삶은 계란 두어 개 먹곤 트랙터를 몰고 논으로 갑니다.

그런 동생을 보고 어머니가 “ 에그, 누가 지더러 농사지으라고 했간디 농사지은다고 삐쩍 마르게 고생만 하누” 하곤 안쓰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기에 하는 소리입니다. 거기엔 자식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에 담겨있음을 알기에 동생은 나가며 피식 웃고 맙니다.

저녁을 먹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은 이내 차 속에서 잠이 듭니다. 아들 녀석은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던지 가는 코까지 곱니다. 아이의 머리를 바로 세워주고 운전하는 내 어깨를 주무르며 아내가 한 마디 합니다.

“오늘 우리 서방님 힘들었겠네. 난 오늘 공연 못 봐서 아쉬운데 자긴 뿌듯하지? 동생 도와줘서.”
“그걸 말이라고 해. 늘 미안한데 이렇게라도 일하고 오면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이 좀 낫지. 제수씨한테도 미안한 마음이 덜 하고. 당신도 애썼어.”

그러면서 아내의 손을 잡아주니 피식 웃습니다. 가끔 투정을 하긴 하지만 남편이 하는 대로 따라주고 이해해주는 아내입니다. 아내의 손을 잠시 잡고 돌아오는 길, 비록 아이들과 보고 싶은 건 못 봤지만 마음은 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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