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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더구나 미륵봉 정상에 오르기 직전 까마득한 화강암 절벽에 새겨진 마애석불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 다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들. 수직 바위 절벽에 저렇게 큰 불상을 어떻게 새겼을까? 누가 새겼을까? 어떤 목적으로 새겼을까?

10년 만에 미륵산을 다시 찾았다. 10년 전에는 비포장에 비 내린 뒤라서 언덕길에는 차에서 내려 차를 밀기까지 하며 고생도 많이 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대부분의 길이 포장되어 별다른 고생 없이 산 입구에 도착했다.

귀래면, 미륵산이 있는 곳의 지명이다. 귀한 분이 오신 곳이라 해서 귀래면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경순왕 때 공주가 이 절에 와서 부왕의 모습을 산 위 바위 절벽에 새기게 했고, 그 뒤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새겨진 모습을 보고 갔다고 한다. 원주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황산사에는 경순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흔적이 남아 전하는 곳이 황산사지이고 미륵산이다. 한때에는 이 산 이름을 대왕산이라 부른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쇠락해가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을 떠받들어 산 위 바위 절벽에 왕의 모습을 새기고 영정을 모셔두기 위한 사찰을 지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미 국운은 기울어 지방의 곳곳에서는 호족들이 할거하던 시기였다. 원주도 치악산을 중심으로 양길이란 세력이 있었고, 궁예가 그 부하로 들어왔다가 양길을 제거하고 패권을 잡던 시기가 이 무렵이다. 이런 때에 경순왕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미륵산까지 와서 바위절벽에 자신의 모습을 새길 수 있었을까?

신라 말기에서 고려로 넘어가던 무렵에는 왕이 아닌 지방 호족이 각 지역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던 시기였다. 경순왕의 힘이 미칠 수 있었던 지역은 경주 부근과 호족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서나 가능했을 것이다. 양길이나 궁예가 장악한 원주 부근에 경순왕의 힘이 미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설처럼 경순왕의 모습을 새긴 바위절벽을 찾을 수는 없다. 미륵산 정상의 바위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을 경순왕의 모습으로 해석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마애석불이 새겨진 것은 누구의 뜻이 반영된 것인가? 다름 아닌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호족이다. 그 호족이 양길인지, 양길을 제거한 뒤의 궁예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마애석불의 모습에서 경순왕이 아닌 호족의 모습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신라 말의 호족 세력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각지에 거대한 불상을 건립하거나 마애석불을 새겼다. 국왕의 권위를 석굴암을 통해 찾으려 했던 통일신라 왕실처럼, 신라 말기 호족들은 나름의 불상과 마애석불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부각하려 애썼던 것이다. 전국 각지에 할거하던 호족 세력은 경쟁적으로 불상을 건립한 탓에 정교함보다는 거대함을 추구하게 되어 거대한 불상과 마애석불이 만들어졌다.

ⓒ 이기원
미륵산 마애불도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해석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신라 말의 혼란 속에서 민중들을 구원해줄 존재로서 호족들이 자신을 미륵불의 모습으로 이상화시켜 민중의 지지를 유도했던 것이다. 궁예도 자신을 미륵불이라 자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경순왕의 존재가 전설 속에 등장하는 건 어떤 이유일까. 경순왕이 자신을 부각하기 위해 찾았다기보다는 다른 이유로 황산사를 찾았던 것이 전설에 담겨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현재 황산사지에는 황산사 삼층석탑 하나가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세월 속에 묻힌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삼층석탑은 홀로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지켜보고만 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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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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